- 列國誌 195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
<張良과 張家界에 대하여>
張良의 字는 子房이고 漢나라의 開國功臣이자 불세출의 大 戰略家이다. 張良의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의 安徽省 毫縣 동남 지역의 사람으로 祖父와 親父가 代를 이어 韓나라 소후와 선혜왕의 五代에 걸쳐 宰相을 지낸 것으로 傳해진다. 秦나라가 韓나라를 멸망시킨 後, 韓나라의 國權회복을 도모하며 자객들과 교류를 맺고 博浪沙에서 秦始皇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하여 下邳(하비)로 도망치게 되었는데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난 黃石公으로부터 太公兵法 <강태공이 직접 쓴 兵書>을 얻었다고 한다.
秦나라 末期 농민전쟁 중에 무리를 모아 유방에게 가서 君師가 된다. 楚漢의 전쟁기간 동안,
1. 6 國의 後代를 세우지 말 것,
2. 英布, 彭越과 연합할 것,
3. 韓信을 重用할 것" 등의 원대한 계략을 건의하였으며
4. 남쪽의 項羽와 楚나라를 섬멸할 것을 권고하여 劉邦이 項羽를 꺾고 漢 王組를 건립하는 데 지대한 功을 세웠다.
漢 왕조의 建國 後, 유방은 장량에게 특등공신으로 대우하여 큰 封土와 官爵을 내리고자하였으나 장량은 이를 고사하고 장가계에 들어가 道敎에 심취하여 여생을 마친다.
장량이 어떻게 죽었는지, 死後에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辭海>에는 "張良과 黃石公을 함께 합장시켰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지점은 적시하지 않았다. 당대의 蕭德言(소덕언)은 括地志(괄지지)에서 "張良의 무덤은 徐州 沛縣 동쪽 65 里에 있고, 留城과 가깝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황석총을 張良의 묘로 착각한 것으로, '史記'와 '前漢書'만 대조해 보아도 그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一說에는 張良이 長安 인근의 終南山으로 들어갔다는 說도 있으나 劉邦과 呂太后를 알게되자 <개국 공신들을 모조리 잡아죽인 사실> 그를 피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首都인 長安(함양~ 지금의 西安) 과 가까운 終南山으로 들어갔다는 說은 상식적으로 맞지않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 列國誌 195
** 漢高祖 列傳 27
** 呂 皇后와 戚妃의 갈등
呂后는 이팔 청춘의 꽃다운 나이로 무명 청년, 劉邦과 결혼하여 한평생을 유방과 함께 생사 고락을 같이해 왔다. 유방이 천하를 도모 하려는 야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흙먼지 휘날리는 戰線에서 東奔 西走하기 장장 30 여 년!
그동안 呂后는 젊은 나이로 얼마나 많은 고독과 함께 근심, 걱정, 불안의 날 들을 보내야 했던가 ?
그러나 본래 성품이 강인한 呂后는 남편이 꿈을 이루는 데 아낌없이 협력해 온 것은 물론이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있어, 內助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었다.
天下만 통일하고 나면, 呂后는 천하의 國母로서 유방과 더불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천하를 통일한 뒤로, 남편 유방은 呂 后에게는 오직 <皇后>라는 허울 좋은 명예 하나만 걸쳐주었을 뿐, 단 하룻밤도 따뜻한 애정을 베풀어 주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천하가 통일된 뒤로는 유방은 더 많은 女色을 탐하기에 여념이 없는게 아닌가 ?
게다가 이제는 呂 后 자신도 너무 늙어 거들떠보지도 않음은 물론, 수수 大戰에서 참패하고 도망치다 만난 하룻밤 인연으로 젊고 아름다운 戚妃를 당당히 西宮에 들여 앉혀 놓고, 밤낮으로 애정을 쏟아 오고 있으니, 呂后는 자신으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간 戚妃에게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오냐 ! 이년, 두고 보자. 내 이 怨恨을 언젠가는 네년에게 반드시 갚아주고야 말 것이다 ! )
이렇게 毒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위세에 눌려 감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밤마다 獨守空房을 지키며 타 오르는 情炎을 억제하며 살아오다보니 戚妃에 대한 복수심은 날이 갈 수록 뼛속 깊이 사무치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만 끝나지 않았다.
呂后는 자신의 아들인 盈(영)이 이미 太子로 책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戚妃는 이불 속에서 남편을 구워삶아 자신의 아들 <如意>를 太子로 바꿔 치우려는 책동까지 벌이지 않았는가 ?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如意가 자신의 아들인 <영>을 밀어내고, 태자로 책봉된다면 呂后는 <皇后의 자리>까지 戚妃에게 빼앗겨 버리는 신세로 전락해버리지 않았을 것인가 ?
천만 다행으로 太子를 바꾸는 문제는 朝廷 大臣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張良 선생의 도움으로 원만하게 해결되기는 하였으나,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갈등과 잡음은 모두가 戚妃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呂后는 戚妃를 不俱戴天의 원수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戚妃가 남편을 빼앗아 간 것만도 가슴을 칠 노릇인데, 이제는 皇后의 자리까지 빼앗으려고 유방을 꼬드겼으니, 呂 후가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타 있는 것은 여자로서는 있을 수 있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시앗 싸움이다. 일반 世人들 間에서도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는데, 유방은 천하를 한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 그렇다면 누가 장차 이를 물려받을 것인가 ?
유방은 오랫동안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아온 관계로, 시앗 싸움의 심각성을 몸소 겪어 왔었다. 그러면서 呂后와 戚妃는 共存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는 임종에 즈음하여 太子를 불러 놓고 그 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하도록 간곡한 유언까지 남겼던 것이었다.
(유방은 화살 독의 여파로 죽게되는데 자신의 종말을 느꼈는지 치로차 불려온 名醫에게 치료를 중단케 하고 황금을 내려주어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앗 들의 싸움이란 유언 하나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유방이 죽었을 때 呂皇后는 60 고개를 바라보는 노파였다(지금으로 치면 80세쯤?) 게다가 남편이 죽고 자신의 아들인 太子가 帝位에 오르자, 그녀는 太后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60이 다 된 일국의 太后라면 누가 보아도 점잖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앗의 싸움에는 감정도 나이도 체면도 없었다.
남편이 죽고 나자 그녀의 머릿속에 대뜸 떠오른 생각은,
戚妃년을 그토록 알뜰살뜰 감싸 주던 영감이 죽었으니, 이제야 말로 그년과 그년의 자식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릴 때가 되었구나. 이 년 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너희 母子를 죽여 없애리라...
하는 복수심뿐이었다.
여 태후의 가슴속에는 척씨 부인 모자에 대한 원한이 이토록이나 사무쳐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숨을 거두기가 무섭게 여 태후는 조커뻘 되는 <여수>를 불러 이렇게 명했다.
"皇上께서 돌아가셨으니까, 戚女가 아들에게로 도망을 갈지 모른다. 너는 지금 西宮으로 官憲들을 데리고 달려가 그년을 당장 영항(永巷: 궁녀들의 감옥)에 가두고 엄하게 감시토록 하여라."
여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 가신 폐하께서 그토록 총애하시던 <西宮>마마>를 무슨 일로 영항에 감금하시라는 분부이시옵니까 ?"
그러자 呂 太后는 크게 화를 내며,
"백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년을, 너는 어째서 <서궁마마>라는 존칭으로 부르느냐 ? 아무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당장 달려가 그년을 하옥시키란 말이다. 만약 나의 명령에 차질이 있게되면 너 도 무사치 못하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