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 列國誌 26

jahun 2021. 5. 2. 18:40

# 列國誌 26

**秦始皇 時代

(前 回나 前 前回에서 秦王의 이름이 '正' 字로 잘못 표기된 것은 '政'字로 정정합니다.)

秦王 政은 6國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나자, 문무 백관들을 咸陽宮으로 불러들여 천하 통일의 축하연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진왕은 그 자리에서 문무 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내린다.
< 나는 오는 날 天下를 통일함으로서 戰國時代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소. 이제는 어느 누가 감히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올 것이오 ? 앞으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니, 전국에 있는 무기는 모조리 거두어 들여서 무쇠로 녹여 가지고 철인(鐵人)을 만들도록 하시오. 나는 宮庭에 철인들을 장식물로 세워 두고, 전국 시대를 회상하며 평화를 즐기도록 하겠소. 그리고 과거에도 聖王이 많았지만, 나처럼 천하를 통일한 제왕은 나 말고 또 누가 있었소 ?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나는 '大王'이라는 칭호 가 너무도 왜소하게 느껴지는 바이오."
그리고 승상 이사(李斯)를 돌아보며 물었다.
"승상은 歷史에 밝으시니까 하나 묻겠소. 오는날까지 역사상 위대한 임금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소 ?"
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역사상 위대했던 임금에는 , 三皇 五帝가 있사옵니다."
"三皇이란 누구이며, 五帝는 누구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
"三皇이란 고대의 天皇氏, 地皇氏, 人皇氏의 세 임금을 말하는 것이옵고,
五帝란 그 다음 시대의 소호(小昊), 전욱, 제곡, 요(堯), 순(舜)의 다섯 임금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聖業을 나의 天下統一과 비교한다면, 어느 편이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소 ?"
실로 오만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신들은 약삭빠르게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삼황 오제가 제아무리 聖君이셨다 하기로, 그들의 업적을 어찌 감히 대왕의 천하통일의 大 聖業에 비교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秦王은 그 아부성 답변이 만족스러워 호탕하게 웃으면서 승상 이사에게 다시 물었다.
"삼황 오제의 업적과 나의 업적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크다고 말들하는데,
승상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이사가 대답하는데,
"그것은 사실이옵니다. 삼황 오제가 善政을 베푸셨다고는 하나, 그것은 일부의 지방에만
국한되었을 뿐이었고, 대왕께서는 천하를 통일 하셨으니 어찌 삼황 오제의 업적과 비교할 수
있겠사옵니까?"
"옳은 말씀이오. 업적이 별로 대단치도 않았던 그들이<三皇 五帝>로 불려 왔다면, 나에 대한 칭호도 무언가 새롭고 다르게 불려야 옳지 않겠소 ?"
春秋 戰國 時代에는 크고 작은 국가가 70여 개나 되었고, 그들은 각각 자기 나라의 임금을 한결같이 大王이라고 불러왔으나, 모든 국가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한 지금에 와서는 그 흔한 大王이라는 칭호보다는 秦王은 조무라기 '대왕'들과 현저하게 차별되는 <새로운 임금>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칭호로 불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승상 이사는 秦王의 그러한 심리를 재빠르게 알아듣고, 머리를 조아리며 품했다.
"천하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신 지금에 와서는 <大王>이라는 칭호는 너무도 왜소하고 부적절한 칭호인 줄로 아뢰옵니다. 古代에는 聖君을 '天子'라고 불러 왔사오니, 오늘부터 대왕께서도 '천자'로 하심이
어떠하겠사옵니까 ?"
"天子 ....!? 천자라는 칭호는 '하늘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오 ?
그 칭호도 나쁘지는 않으나 '天子'라는 칭호는 남들이 이미 써 오던 칭호가 아니오 ? 그보다는 '三皇 五帝' 처럼 나의 업적을 뚜렸이 나타내 보이는 새로운 칭호로 불리고 싶구려."
"물론 그러셔야 하실 것이옵니다. 大王께서는 어떤 칭호로 부르게 하심이 좋으시겠나이까 ?"
秦王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과거에는 별로 대단치도 않았던 임금들 조차 三皇이니, 五帝니 하고 불려 왔던 모양이나, 나의 경우, <三皇 五帝>를 하나로 뭉친 '皇帝'라고 부르면 어떻겠소 ?"
秦王의 그 제안에 승상 이사는 크게 감탄하였다.
"과연 탁월하신 착상이시옵니다. 대왕께서는 <三皇 五帝>의 모든 업적을 合한 것보다도 더 위대하신 업적을 이룩하셨음으로, 칭호 또한 마땅히 '皇帝'로 불리셔야 함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이리하여 그날부터 秦王 '政'은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로 부르게 된다.
진왕은 <皇帝>라는 새로운 칭호가 매우 만족스러운지 유쾌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내 손으로 천하 통일을 이루었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자손들이 대대로 물려 내려가며 황제의 자리를 누리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나 자신을 <始皇帝> 와 <秦始皇>으로 부르고, 그 다음 代에는
<二세 황제> <三세 황제>로 부르게 하겠소. 이렇게 이 나라는 나의 자손들이 萬代를 누려가며 통치하게 될 것이오."
이리하여 秦王은 그날부터 자기를 <始皇帝> 또는 <秦始皇>으로 부르게 하였다.
** 기원전 221년, 秦王 '政'이 戰國 六雄을 제압하고 중국 최초로 전국을 통일하였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그 스스로 皇帝가 되었다.
(갑자기 "역사는 반복된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E. H Carr 교수의 말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진시황이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후, 2239년이 지난 2018년 3월, 全人大(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기존의
法을 뜯어 고쳐, 21세기 중국에 또 다른 시황제가 탄생했으니 그가
바로 시진핑(習近平)국가 주석이다.
세계의 언론은 시진핑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아마도 시진핑은 푸틴을 보고 배웠으리라!...)
2200여 년 前, 秦始皇은 在位 26년 만에 戰國을 통일하였으나,
亡하는데는 불과 10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傳해져 오는가?
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고,
月滿卽虧(월만즉휴),
物極必反(물극필반)이라는 말이..
그러나 始皇帝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大王들은 자기 자신을 '寡人' 이라 칭해 왔었소. 그러나 大王이 아니고 皇帝인 나에게는 그 말도 格에 어울리지 않으니, 그 말을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겠소 ?"
승상 이사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과인>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수많은 대왕들이 써온 어휘이므로, 황제께는 적합하지 않사옵니다. 하오니 황제께오서 신하들에게 자신을 지칭하실 때에는 짐(朕)이라고 하심이 어떠하올지요 ?"
"朕이라!.... ? 짐이란, 어떤 글자를 쓰는 것이오 ?"
"짐이란, 나 짐(朕) 字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내 자신을 말할 대에는 '朕'이라고 하겠소.
그 대신 '朕'이란 말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황제께서 쓰시는 <朕>이라는 말씀을 어느 누가 감히 쓸 수오이까?"
이리하여 <皇帝>와 <朕>이라는 말은 秦始皇에 의해 最初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시황제는
全國을 36 個 郡으로 나누어, 각 고을 군수를 직접 임명하는 中央集權制를 확립하고
모든 법률도 전국에 획일적으로 통하도록 조정하고, 度量衡 : 길이, 부피, 무게)도 전국이 동일하게 쓰도록 하였다.
秦始皇은 이렇게 國基를 다져 놓고 나자,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12 萬 호에 달하는 富豪들을 모두 다 咸陽으로 불러들여 수도에서 함께 살게 하는 동시에, 자신도 阿房宮이라는 거대하고 호회스러운
宮闕을 새로 지어 전국의 젊고 아름다운 美女 3천 여 명을 아방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死後를 대비하여 자기 자신의 墓宮도 축조하도록 하였는데, 그 假墓는 봉분의 높이가 4 백 자에, 길이가 2 천 자에 이르고, 내부에는 축소한 黃河와 揚子江까지 만들어 놓고, 물 대신에 水銀을 흐르게 함과 동시에 수많은 諸將과 諸卒의 호위 군사상 (像)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던 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시황 시대에는 이러한 거대한 토목 공사가 수 없이 이루어졌는데, 그 모든 공사가 오로지 백성들의 부역(賦役)으로 충당되었으니 천하 통일의 기쁨은 오직 진시황 한 사람에 국한되었고, 백성들은 언제나
부역과 세금 수탈로 죽지못해 사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승상 이사는 法治主義者로, 때때로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공표하고,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죄질에 따라 五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五刑이란,
1)얼굴에 글자를 새겨 넣는 형벌, 2)코를 베어 내는 형벌을 비롯하여, 3)남의 여인을 사사로이
犯한 사내의 불알을 까버리는 형벌, 4)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淫行을 저지른 여자의 음부의 돌기를 잘라내는
형벌,
5)殺人을 한者는 거리에서 허리를 잘라죽이는 형벌 等, 다섯 가지의 형벌을 말한다.
始皇帝는 나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져 놓고 나자, 그때부터는 낮에는 사냥을 즐기고, 밤이면 아방궁에서 미녀들을 불러 酒池肉林 속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40세였다. 그때까지 40평생을 戰國 統一의 戰塵 속에서만 살아왔으니, 천하를 제패한 이제 부터는 여생을 즐겁게 보내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丞相 이사는 시황제의 이러한 생활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바가 있어 하루는 이렇게 간한 일이 있었는데...
"자고로 聖君은 천하를 끊임없이 순회하시며 民情을 소상하게 살피시와 모든 民願을 정치에 반영시켰사옵니다. 황제께오서는 오늘 날 처럼 九重宮闕 에 앉아만 계셔서는 천하의 痼疾을 어찌 아실 수 있사오리까 ?
하오니 차제에 황제께서도 전국을 두루 순회하시며 민심을 두루 살피심이 좋으실 줄로 아뢰옵니다."
시황제는 그 간언을
좋게 여겨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거 참 좋은 말씀을 해주셨소. 그렇지않아도 朕은, 짐의 나라 모든 국토를 짐의 눈으로 직접 돌아보고 싶었소이다. 우선 농서 지방으로 떠나도록 할 것이니 짐의 행차에 불편함이 없도록 농서까지
새로운 길을 닦아 놓도록 하시오."
咸陽에서 농서에 이르는 길은 첩첩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멀고 먼 千里 길이었다. 그 험난한 곳에 황제의 수레가 지나 갈 皇帝專用道路를 새로 닦아 놓자니, 거기에 죽어나는 사람들은 백성들 뿐이었다.
萬 여 명이 한 달 동안이나 끼니를 제대로 먹지못하며 새 길을 닦았지만 始皇帝는 백성들의 그 같은 노고에는 추호의 배려도 없었다.
이윽고 시황제가 지방 순행길에 올랐다. 황제가 타는 <온량차>는 창문이 여섯 개나 있는 거대한 수레였다. 거기에는 시녀도 10여 명이나 동승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앞 뒤에는 각각 5 千 여 명의 騎馬隊가 호위하였고, 이를 뒤따르는 무리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들은 음식과 禮服, 침구류와
의료등을 전담하는 행렬이었다.
이렇게 거창한 시황제의 행차에는 그가 탄 온량차가 진행하는 좌우편 길가에는 황제를 전송하고 영접하는 백성들의 도열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였고, 그들은 온량차가 지날때 마다, <시황제 폐하 만세!>를 소리높혀 외쳐야만 했다. 시황제는 그때마다 온량차 창문을 열고 손을 들어 백성들의 환호에 答하며,
백성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을 <皇帝의 시혜>라며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가에 엎드려 그를 영접하는 백성들은 모두가 秦에게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어서 개중에는,
(우리나라를 빼앗은 者가 바로 저 X이구나 !)
하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가진자가 없지 않았지만, 시황제는 백성들의 그 같은 원성을 개의해 본 일
조차 없었다.
개, 소, 돼지 같은 것 '들에게 나의 거룩한 얼굴을 직접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자비로운
聖君이냐 ?'
(* 개, 소, 돼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린데?...)
秦始皇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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