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 熱國誌 23

jahun 2021. 4. 26. 18:23

# 熱國誌 23

** 百戰老將의 智略
젊은 장군 왕분(大將軍 王翦의 아들)이 위왕의 사술(詐術)을 역이용하여 위나라를 일거에 패망시키고 함양으로 개선해 오자, 秦王은 그를 손수 맞으며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역시 젊은 장수라야 해 !"..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李信 장군에게 군사 20 萬으로 楚를 치라는 命을 내린다.
李信은 몽이(夢怡) 장군과 함께 20만 군사를 이끌고 자신 만만하게 楚나라를 향해 떠났다.
楚나라에서는 정탐꾼을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미리 탐지하고 급히 중신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老臣 부추(負芻)가 王에게 아뢴다.
"지금 秦將 李信과 夢怡가 군사 20 萬을 이끌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오고 있으니, 이들을 조속히 무찌르지 아니하면 국가의 存亡이 위태롭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자 楚王은 대장군 항연<項燕>을 불러 명한다.
"장군에게 군사 20萬을 내어줄 테니, 곧바로 나가 그들을 섬멸하시오."
항연은 수많은 楚將 중에서도 맹장으로 소문난 장수였다. 어명을 받들자 즉석에서 대답했다.
"이신과 몽이는 젖비린내 나는 장수들이오니, 무엇을 두려워 하오리까 ? 臣이 곧 달려나가 그들을 생포해 와 대왕의 근심을 덜어드리겠나이다."
項燕은 휘하 장졸에게 말했다.
"이신과 몽이는 兵法도 모르는 우장(愚將)들이다. 내가 먼저 단신으로 나가 싸우다가 거짓으로 쫒겨 올 테니, 그대들은 산협(山峽)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이 나를 추격해 오거든 일시에 산 아래로 내달아 가차없이 공격을 퍼부어라. 그리하면 저 둘을 쉽게 생포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항연은 이러한 작전 계획을 미리 시달해 놓고, 소수의 군사를 대동하고 秦軍 앞으로 나아가 단기 필마(單騎匹馬)로 적진을 향하여 달려 나가며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젖비린내 나는 李信과 夢怡는 이리 나와, 대장군 항연의 청룡 은월도(靑龍銀月刀)를 받으라 ! "
그러자 이신과 몽이는 약이 바짝 올라 長劒을 뽑아들고 항연을 향하여 내달리며 외쳐대었다.
"오냐 ! 네가 , 楚나라의 늙은이 항연이냐 ? 오늘 그대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리라 ! "
양쪽의 장졸이 숨죽이고 지켜 보는 가운데, 들판 한 복판에서 1대 2의 장수들의 대결이 펼쳐졌다.
창 검이 불꽃을 내며 부딪치기를 30여 합 , 항연은 일부러 숨을 헐떡이며 쫒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이신과 몽이가 항연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격하기를 삼십 여 里,
그러나 산협이 가까워 오자, 이신은 추격을 멈추고 몽이에게 말했다.
"敵은 필시, 성부 산협(城父山峽)에 陣을 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오늘은 일단 돌아갔다가 부대를 정비하여 수일 내에 본격적으로 쳐들어가기로 합시다. 우리가 동서 두 방면으로 일시에 쳐들어가면, 적을 틀림없이 괴멸시킬 수가 있을 것이오."
몽이도 그 작전 계획이 옳다고 여겨, 그들은 추격을 멈추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楚將 項燕은 이신과 몽이가 끝까지 추격해 올 것으로 알았는데, 중도에서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가자 크게 실망하였는데,
급히 첩자를 보내 알아보니 적은 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本陣에서 30리 후방으로 이동 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楚將 항연은 첩자의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졸들에게 새로운 군령을 내렸다.
"秦軍은 부대를 再편성하기 위해 30 里를 후퇴하고 있다하니, 이때야말로 敵을 섬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부대가 후방으로 이동할 때에는 경계가 소홀해지는 법,
우리가 지금 곧 지름길로 저들을 앞질러 가서 그들이 지나갈 유곡 산협(維谷山峽)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오면 모조리 몰살해 버린다."
이에 楚軍은 빠른 속도로 지름길을 가로질러 가 維谷 山狹에서 秦軍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楚將 項燕의 예상대로 이신과 몽이는 부대의 再정비를 위한 이동이라 경계도 별로 하지않고 이동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곡 산협을 절반쯤 통과했을 때, 楚軍은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함성을 지르며 구름떼처럼 전후좌우 사방에서 들고 나와 벼락같은 기습을 감행한다.
무심하게 이동중이던 秦軍은 생각하지도 못한 기습으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楚軍은 닥치는대로 秦軍을 휘몰아쳐 죽였다. 사태가 이렇게되자 이신과 몽이는 도저히 楚軍을 당해낼 수 없어 그들도 허겁지겁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여지없이 참패하고, 겨우 5 萬 여 명의 군사만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왔다.
20 萬 군사만 주면 기필코 승리하고 돌아오겠노라고 장담하고 출정했던 李信으로서는 진실로 면목없는 귀환이었다.
李信과 夢怡가 楚나라의 名將 項燕에게 大敗하고 돌아오자 秦王은 大怒하여,
"당장 이신과 몽이의 목을 쳐라."
하고 추상같은 命을 내린다.
그러자 군신들이 간한다.
"殿下, 전쟁에서 一勝 一敗는 兵家之 常事라고 하였사옵니다. 더구나 敵將 항연은 智勇을 겸비한 名將이므로 이신과 몽이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장수들이었으니, 바라옵건데 저들의 그동안의 전공을 생각하시와, 斬刑만은 免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秦王은 그제서야 수긍되는 점이 있는지 이렇게 말한다.
"하기는 왕전(王翦)
장군은 60 萬은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李信의 말만 믿고 그에게 20 萬 의 군사만 주어 보냈으니, 내게도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오. 아무튼 이 원수는 꼭 갚아야 하겠으니, 王翦장군
을 급히 모셔오도록 하오."
王命에 의하여 老將 왕전이 御殿에 출두하였다.
그러자 秦王은 친히 壇下로 내려와, 왕전의 두 손을 움켜 잡으며 말했다.
"내가 불민하여 李信의 말만 믿고 장군의 말을 무시했다가 오늘의 참패를 초래했으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장군은 나의 잘못을 용서하고, 나와 함께 지략을 모아 楚를 다시 치기로 하십시다. 나는 오로지 장군만을 믿겠소이다."
누구에게나 절대 君主로 군림해 왔던 秦王으로서는 처음있는 겸손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지나친 겸손에, 왕전은 오히려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느껴졌다.
노장 왕전은 고개를 숙인채 잠시 깊은 명상에 잠긴 後,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王의 龍顔에는 언제나 패기와 오만이 넘쳐 흘렀지만, 오늘따라 왕의 얼굴에는 우수와 불안감이 짙어보였다.
(命令만 내리면 되거늘, 오늘은 어찌하여 臣下인 나에게 이처럼 간청하는 태도로 나오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楚軍에게 敗한 충격이 너무도 컸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楚를 이길 장수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나에게 부탁하는 태도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왕전은 다시 한 번 불안감이 스쳐갔다. 만약, 자신이 楚를 정벌하고 나면, 秦王은 자기를 살려 둘 것 같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왕전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小臣은 老弱하여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사오니, 大王께서는 다른 勇將을 등용하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나 秦王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사정하듯 말했다.
"내가 믿을 사람은 장군밖에 없으니, 수고스럽지만 내 말을 꼭 들어주기 바라오."
왕전은 대왕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더 사양했다가는 오히려 '괘씸죄'로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질 것같았다.
왕전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대왕께서 기어이 老臣을 쓰시겠다면, 어찌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러나,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楚를 섬멸시키려면 군사가 60 萬은 되어야 하옵니다."
"알겠소. 과인이 군사 60 萬을 내어드릴 테니, 楚를 꼭 정벌해 주시오."
이리하여 백전老將 王翦은 60만 대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60 萬이라면 秦나라 百萬 대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강한 군사였다.
(내가 만약 이처럼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楚를 정벌하고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오게 되면, 大王은 나의 존재가 두려워 그때는 나를 兎死狗烹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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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將 왕전의 경우와 유사한 사례가 2천 여 년이 지난 현대에 재현 된 사건이 있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이라고 한 이 말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전은 물론, 제2차 세계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미국의 五星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 Douglas Mac Arther, 1880 ~ 1964 >元帥가 퇴임전, 의회 연설에서 단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이끈 아이젠 하워 장군<終戰 後, 미국 대통령에 당선>도 당시에는 맥아더장군의 참모에 불과하였었다.)
요즈음, 이런 名言을 기억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은 것은 교육의 잘못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학생들의 국가관을 정립시키지 못하고 있는 교육 당국, 나아가 집권 정부의 책임이라고 본다.
* 심지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훼손하려는 불순세력에 대해서도 미온적으로 對하고있는 현실임에랴!...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불의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이 유엔 총회에서 16개 연합군의 참전을 결의 함으로서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UN軍 총사령관은 맥아더 장군이었고 그는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전격적으로 감행하여 전쟁 판을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맥아더 장군은 여세를 몰아 서울 수복 후, 38 선을 그대로 돌파하여 평양을 탈환하였으며,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후퇴를 거듭하던 김일성은 中共의 毛澤東에게 화급히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모택동은 日帝시대, 抗日 전투부대로 알려진 공산당의 '八路軍'을 한국전의 주력부대로 참전시킴으로서 한국전은 국제전 성격으로 확대되었다.
추가하여, ~
中國 西安은 2000 여 년 동안 과거의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 들의 首都였다. 周나라의 武王 때부터 漢, 魏, 西晋, 秦, 隋, 唐까지, 唐나라 때는 長安으로 불린 西安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王朝의 수도로 오늘날의 北京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중국의 國都였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지만 아방궁도 이곳에^^)
그 西安을 여행하다보면 일정 중에 西安에서 120km 쯤 떨어진 華山을 돌아 보게되는데, 케이블 카를 타기 위해 내린 휴게소 가까이에 저들이 자랑하는 '八路軍 의 銅像'이 나온다..
毛澤東은 抗日전쟁에 이어 蔣介石의 국민당 軍을 격퇴하고자 "산넘고 물건너 임무를 완성한 그 부대", 즉 八路軍을 對 한국戰에 투입한다.
北進을 거듭하던 UN軍은 예기치 않은 中共軍의 대거 참전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1951 년의 1.4 후퇴)
3~4 명이 궐기하는 그 팔로군의 銅像을 보았을 때,
느낀 묘한 감정!!.. 그곳을 다녀온 독자 제위께서도 以心傳心 저와 같은 심경이었으리라..)
이때, 人海戰術로 물밀듯 몰려오는 中共軍과 맞서 싸우던 맥아더 장군은 단판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불과 6 년 前, 일본을 항복시켰던 원자 폭탄을 만주에 투하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 : 1884 ~ 1972>은 제 3 차 세계대전을 우려해 휴전을 원하고 있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큰 것 한방으로 中共의 추가 파병을 막고, 거대한 인구와 영토를 가진 중공의 기세를 사전에 꺾어버림으로써 전쟁의 승기를 UN軍이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나, 트루먼은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가 개선 장군으로 귀환하여 정치 일선에 나선다면, 자신에 대한 심각한 도전자가 될 것으로 판단하여 UN군 총사령관 직에서 맥아더 장군을 '명령위반'罪로 소환, 해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창시절, 트루먼을 '투가리'< 흙으로 만든 깨지기 쉬운 질그릇 >로 비하, 겁쟁이로 戱畵化하기도 했었다.
무엇이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
역사에 假定이란 있을 수없으나,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땅을 칠 수밖에 없는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라!...
지난 역사는 오늘도 말이 없다.ㅜㅜ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은 2千 年 前, 절대 봉건왕조의 秦나라 시대, 秦王과 왕전 (王翦)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史實의 현대판과 흡사하다할 만하다.

왕전(王翦)은
그런 의구심이 없지 않아, 패수(覇水)까지 전송나온 秦王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다.
"老臣은 大王殿에 부탁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부탁인지 말씀해 보오."
"황공한 말씀이오나, 老臣이 이번에 功을 세우고 돌아오면, 여생을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널찍한 장원(莊園)이나 하나 하사해 주시옵소서."
"걱정 마오. 楚를 정벌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슨 소원인들 들어 드리지 않겠소."
"다른 욕심은 아무것도 없사오니, 노후에 화초를 가꾸며 농사나 지어 먹고 살 莊園 하나만 하사해 주시면 되옵니다."
"하하하 ! 걱정 마시래두 그러시는구려."
秦王은 크게 웃었다.

王翦(왕전)은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楚나라로 가는 도중에도, 秦軍 상황을 보고하는 파발마(擺撥馬)의 보고서 말미에,
"小將이 살아서 돌아가게 되거든 莊園을 꼭 하나 하사해주시옵소서."
하는 청원을 세 번이나 올렸다.
왕전의 심복 장수 하나가 그 사실을 알고 왕전에게 직언 을 올린다.
"장군께오서 物慾을 너무 밝히시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으실런지요? "
그러자 왕전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사실인즉, 내가 物慾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 大王께서는 본시 난폭하신 면이 있는데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품까지 가지고 계시지 않으냐 ? 그런데 내가 우리나라 全 군사의 3분의 2에 이르는 60 萬 大軍을 이끌고 나왔으니, 대왕께서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구심을 품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 그래서 나는, 아무런 野心도 없는 사람임을 大王께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보낼때마다 <莊園 하나만 하사해 주십사> 하는 글을 올리는 것이다."
심복 장수는 그 말을 듣고, 왕전의 용의 주도함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전은 楚나라의 國都인 형주성(荊州城) 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왕전은 형주성 근처에 陣을 치고 나서도 싸울 생각은 전혀 하지않고 참모 들에게 아래와 같은 軍令을 내렸다.
"우리는 이곳에서 1년쯤 주둔할 예정이니, 오늘부터 군사들은 경계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농사를 지을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참모들은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장군님! 우리가 싸우러 온 것이지 농사를 지으 려고 온 것은 아니지 안사옵니까 ?"
"내가 그것을 왜 모르겠느냐? 楚軍은 趙, 韓, 燕, 魏 나라 等과는 格이 다른 强軍이다. 그럼으로 전쟁을 조급히 서두르다가는
반드시 실패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번 전쟁은 장기전을 치를 각오를 해야만 인명 피해도 줄이고 승리할 수가 있다."
휘하 장졸들은 老將인 王翦장군의
원대한 작전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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