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 列國誌) 27

jahun 2021. 5. 2. 18:43

# 列國誌) 27

** 始皇帝 時代

시황제의 지방 순행에는 언제든지 대부(大夫 : 지금의 직책으로 하면 대통령 비서실장) 趙高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始皇帝 일행이 농서에 도착하니, 성안에는 환영 인파가 30 萬 명이나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입으로는 '시황제 폐하 만세 !'를 외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무언가 불만과 저항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불과 얼마전에 나라를 秦나라에 빼앗긴 백성들이라
정복자 秦始皇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大夫 趙高는 그런 눈치를 재빨리 간파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는 皇帝의 御殿에서 젊은 청년 하나를 불러,
"황제 폐하께서 지금 이곳으로 순행 오신 것에 대하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청년은 황제의 발아래 엎드려 울면서 대답했다.
"聖恩이 망극하옵게도 황제께서 저희 지방에 臨御해 주시와, 저희 民草들은 감격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趙高는 그 청년의 말을 시황제에게 그대로 告한다.
" 폐하, 이 젊은이의 말을 들어 보시옵소서. 황제 폐하의 성덕이 전국 방방 곡곡에 까지 골고루 퍼져서,
만 천하가 태평 성대를 구가(謳歌)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옵니다."
시황제는 그 말을 듣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고가 미리 꾸며둔 造作劇이었다.
조고는 워낙 奸智가 발달한 인물인 지라, 예의 그 청년을 돈으로 매수하여,
황제 앞에서 ,그렇게 대답하도록 미리 꾸며 놓았던 것이다.
(과거 자유당 시절, 시장을 둘러보는 이승만 대통령..
계란 10개 들이 한 꾸러미 값을 묻자, 100환(지금 돈 10원)이라는 대답을 듣고 시장 상인의 한 달 수입을 묻고는 만족해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그러나 그러한 내막을 알 턱이 없는 황제는 흡족한듯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태평 성대를 마음껏 누리게 하리라."
농서에는 鷄頭山이라는 높은 산이 있었다.
황제가 계두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굽어 살펴보니, 저 멀리 하늘가에 오색 영롱한 구름이 몇 조각 떠돌고 있었다.
"저게 무슨 구름이냐? 저 구름이야말로 이상한 구름이 아닌가?" 하고
始皇帝가 묻자 趙高가 대답한다.
"글쎄옳습니다... 수행원 중에 宋武其라는 占星師가 있사오니, 그를 불러 물어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점성사 송무기가 급히 불려와, 구름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아뢴다.
"구름에는 상운(祥雲), 채운(彩雲), 제운(霽雲),경운(慶雲)等, 여러가지 구름이 있사온데, 지금 저것은 구름아 아니옵고 단순한 雲氣일 뿐이옵니다. 저 운기에는 妖氣가 감돌고 있사온데, 저 요기를 제압해 없애버리시려면, 皇帝께옵서 南方으로 행차하시어, 추역산 정상에 거대한 돌로 황제의 功德碑를 세우시면 될 것이옵니다."
시황제는 妖氣가 발동했다는 말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공덕을 기려 공덕비를 세우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음으로 즉석에서,
"그러면 지금 바로 '추역산'으로 가보자"하고 명령을 내렸다.
鄒忌山<추역산>은 농서에서 동남방으로 5 백 여 里나 떨어져 있는 태산이었다. 황제 일행이 추역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황제 전용 도로>를 닦아야 했다.

[**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과 인권 문제로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고 알려져 있는 카터.
카터는 선거에서 , 주한 미군의 감축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인권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에 상당히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카터가 訪韓했을 때, 우리가 숙소로 제공하겠다는 "5星 급 호텔"도 거부하고 美 제 2 사단 병영 內로 정한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카터가 의정부에서 잠을 자는 그 시간에, 경계 근무를 나가는 초병의 소총에서 공이를 모두 회수하여 중대본부 행정반 사무실에 보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소총의 공이는 실탄을 발사하는 중요한 부속이다.
병역의 의무를 마친 독자 제위께서는 잘 아시리라 믿고 이하 생략함..)
재선에서 실패한 카터가 실토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는데, 그는 "주한미군 감축과 철수는 그 당시 자신이 한국이 처한 현실을 잘 모르고 했던 空約이었다" 고 고백한 바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과는 다르게,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의 자신의 판단미스에 대한 솔직한 고백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 우리나라 대통령도 카터의 솔직함을 좀 배우라고 권유하고싶다.]

얼마후, 시황제 일행은 백성의 피 땀으로 急造된 <황제 전용 도로>를 이용하여 , 추역산으로
행차하던 도중, 갑자기 세찬 소나기를 만나게 되었는데, 황제 일행은 길가에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서 비를 피할 수가 있었다.
비가 그친 후, 황제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 느티나무에게 '五大夫'라는 벼슬을 내렸는데, 우리나라 조선 왕조 때에도 속리산 <正二品> 소나무에 대한 古事가 있다.
이렇게 시황제가 鄒忌山(추역산)에 당도 해 보니, 추역산은 정상에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2백 여리가 한눈에
굽어보이는 명산이었다.
시황제는 占星師 宋武其를 불러 물어 본다.
"계두산 상공에 감돌고 있는 요기를 제압해 버리려면 이 산꼭대기에 짐의 공덕비를 세워야 한다고 했겠다 ? "
송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그러하옵니다. 허공 중에 떠돌며 배회하는 요기를 제압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이 산성에 성상의
위업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우는 길밖에 없사옵니다."
"그러면 이 산성에 朕의 공덕비를 세우도록 하라. 공덕비를 크고 무겁게 할 수록 효과가 클 것이니,
이왕이면 거대하게 세우라."
이리하여 추역산<鄒忌山> 정상에 시황제의 거대한 공덕비가 세워졌으니, 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皇帝, 天位에 임하시사 官制를 새롭게 제정하시고, 法度를 분명히 밝혀 놓으시니 만천하의 백성들이 한결같이 복종하여, 사상 처음으로 태평 성대를 이루었도다. 이로써 治世의
道를 천지와 더불어 운행하시니, 대의 大義가 紹明하여 만백성들의 생업이 날로 번성해
가도다. 황제께서는 천하를 평정하신 이후, 날이면 날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 나시고 저녁에는 늦게까지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國利民福에만 전념 하시니, 貴賤이 융통하고 상하가 융합하여, 황제의 德化는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도다.>
황제는 거대한 비석에 새겨진 자신의 功德碑文을 읽어 보고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그리하여 占星師 宋武其에게 많은 재물을 내려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황제는 咸陽으로 돌아오다가 지부산<芝부산>에도 올라가 보았는데 그곳도 경치가 매우 빼어나므로 그 산 위에도 똑같은 공덕비를 또 하나 세우게 하였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狼牙山 <낭아산>에 들렀을 때에도
눈앞에 펼쳐진 황해 바다의 경치 또한 너무도 뛰어나, 그곳에서는 석 달 동안이나 체류하면서 그곳에도 또 하나의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렇게, 공덕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封建王朝時代 專制 君主 들의 공통적인 생리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김정은의 共産王朝는 말할 필요도 없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까지도 北美회담을 잘 이끈 자신의 외교적 성과로 북한이 더 큰 도발을 하지않고 이 정도의 평화를 구축했다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있지않은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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