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와 書藝

漢詩와 書藝 / 春望 봄의 소망 - 杜甫

jahun 2019. 8. 4. 21:10




春望 춘망 -봄의 소망 -杜甫 두보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성안은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네.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시대를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한 맺힌 이별에 나는 새도 놀라는구나.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봉화불은 석 달이나 계속 오르고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집에서 온 편지 너무나 소중하여라

白頭搔更短 백두소갱단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 짧아져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도 못 꼽겠네.



이 시는 안사의 난 때 두보가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長安)에서 포로로 있으면서 지은 글이다. 이것은 당()의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춘망(春望)의 최초의 일구(一句)이다.
두보는 연내(年來)의 소망이 이루어져 우위솔부(右衛率府) 주조참군(胄曹參軍)이란 관직을 받은 것이 사십삼(四十三) 세시였다. 이젠 소망도 이루어지고, 안정된 생활도 할 수 있다고 생가하던 차에, 돌연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안록산은 동북방(東北方)의 절도사(節度使)로서 18(十八萬)이 넘는 병력을 쥐고, 지금의 북경(北京)에 가까운 범양(范陽)에 있었는데, 실은 현종(玄宗)황제를 좌우에서 모시는 불충(不忠)의 신()들을 토벌한다고 하며 거병을 하였다. 서기 75511월의 일이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그는, 정월에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을 함락시킨후 대연(大燕) 황제라고 일컬었다.
그 해 5, 장안(長安)도 위기에 빠져, 현종(玄宗) 황제를 비롯한 관리나 귀족들은 부득이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두보는 처자가 있는 장안의 동북방의 시골로 목숨만 살아 탈주하였던 것이다.
그 곳도 안전하다고 볼 수가 없어서 더한 산골인 강촌(羌村)이라는 마을로 처자를 소개(疎開)시킨 두보는, 당시 현종의 태자로, 서방(西方)의 영무(靈武)라는 시골에서 즉위한 숙종(肅宗)을 찾고자 출발하였지만, 도중에서 적병의 손에 붙잡혀, 수인(囚人)으로 장안에 압송되었다.
그는 이렇게 하여 붙잡힌 몸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벼슬이 높지도 않고, 또한 백발이 성성한 약하디 약한 노인이었기 때문에(두보는 대단히 빨리 늙었었다) 생명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감시도 비교적 소홀하였다. 그 까닭에 두보는 병화로 여지없이 파괴된 서울의 모습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록산은 원래 호인(胡人; 오랑캐)이다. 따라서 그는 호인만으로 조직된 군대를 기르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호병(胡兵)들은 저 잘난 체 하고 말을 달리니, 부녀자들은 공포에 싸였으며, 거지 행세로 거리를 기웃거리는 왕손(王孫) 공자(公子)들도 있었다.
두보 자신도 또한 사람의 눈을 속여가며, 장안의 거리를 거닐며 슬픈 풍물을 보고는 그 비애를 많은 시로 읊었던 것이다. 춘망(春望)도 또한 그 하나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그것은 서울의 건물이 파괴되었다든가, 당실(唐室)이 안록산에게 졌다든가 하는 것 뿐이 아니라, 나라가 파괴되고, 질서도 어지럽고, 기구도 엉망이며, 인민의 의탁할 곳이 전혀 없어졌다 라는 슬픔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안록산의 난은 그 후 사사명(史思明) 부자(父子)의 난으로 끌고 가서 완전히 평정되기에는 9년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더구나 당시에 있어서는 세계 제일의 대국가였던 당조(唐朝)가 이 난으로 말미암아, 극성기(極盛期)의 질서와 위력을 회복할 만한 실력도 잃고 또한 무인(武人)이 할거(割據)하여 자신도 모르게 쇠퇴해가고 말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조(唐朝)의 기초는 이때 무너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나라가 깨어진 것이다.

 



'漢詩와 書藝' 카테고리의 다른 글

漢詩와 書藝 / 牧隱 李穡  (0) 2019.08.12
漢始와 書藝 / 獨夜 - 萬海  (0) 2019.08.12
漢詩와 書藝 / 旅夜書懷 - 杜甫  (0) 2019.07.28
*鄭 燮(정 섭)-2수  (0) 2019.07.28
應口詩 / 郭晴窓 - 金銑根 妻  (0) 2019.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