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34)최후의 생존자(하)

jahun 2022. 2. 17. 18:05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34)최후의 생존자(하)

섬에서 절대 권력 움켜잡은 호실댁

식량 없고 북풍한설 몰아치자 결국…


선장이 오 사범의 도전에 꼬리를 내림으로써 두령으로서 권위를 잃자 홍일점 호실댁은 티가 나게 오 사범에게 기울어졌다. 바닷가 병풍바위 속 한평 남짓한 백사장이 그들의 밀회장소가 됐다. 오 사범은 더는 자맥질을 하지 않았다. 물은 더 차가워졌고 전복과 소라는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따기 어려운 것보다는 호실댁에게 더 호감을 사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오나 그것은 오 사범의 오판으로 드러났다. 호실댁이 오 사범의 병풍바위 동행 요청을 거부했다. 오 사범이 다시 바다에 들어가 깊이 잠수하여 전복을 따 호실댁에게 바치자 호실댁이 움직였다. 호실댁의 속내가 드러났다. 선장을 두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오 사범의 사나이다움보다 전복을 더 좋아한 것이다. 하루에 백리를 헤엄칠 수 있다는 노루 한마리가 이 무인도에 들어왔다. 옹달샘 옆에 잠복해 있다가 노루를 잡은 사람은 선장이다. 그날이 추석날이다. 그날 밤 여섯사람은 배가 터지게 육식을 하고 안동소주를 두 호리병이나 마시며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른 동굴 밖으로 나온 선장이 바닷가에서 소피를 보고 바지를 추스르는데 호실댁이 따라나와 팔짱을 꼈다. 두사람은 말도 필요 없이 똑바로 병풍바위로 가 훌훌 거추장스러운 걸 벗어던지고 한데 엉켰다. 거의 한달 만의 재결합에 선장은 감격했다.
살아서 돌아갈지 이 무인도에 뼈를 묻을지 모르는 깜깜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남정네들의 종족보존 본능을 자극했다. 체면이고 뭐고 던져버린 발정 난 수컷 다섯은 오로지 호실댁 치마 벗길 궁리만 했다. 정 의원이 절벽 사이에서 백하수오를 캐와 호실댁에게 바치자 그녀는 눈짓을 보냈다. 정 의원이 먼저 병풍바위에 가 있자 호실댁이 뒤따라왔다. 한바탕 거친 일합을 치르고 정 의원이 바지를 추스르며 동굴로 돌아가자 호실댁은 나른한 몸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지난 일을 생각했다.
‘남편이란 작자가 이 여자 저 여자 치마를 벗기며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요즘 저승에서 나를 내려다보면 방방 뛰겠지’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동굴 속에 질서가 잡혔다. 절대 권력을 움켜잡은 사람은 호실댁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옥문에서 나왔다. 호실댁은 여왕벌이요, 남정네 다섯은 일벌이다. 동굴의 기역(ㄱ) 자로 꺾어진 지점에 마른 풀잎을 쌓아 칸막이를 만들고 작은 문은 난파선의 판자로 만들었다. 기역 자 동굴이 방 두개로 나뉘었다. 안방은 여왕벌이, 문간방은 일벌 다섯이 오글오글 비좁게 살았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쌀이다 육포다 소금·고추장 등 난파선 잔해에서 건져낸 식량은 안방의 호실댁이 차고앉았다. 곳간 열쇠를 찬 셈이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지나자 바깥 날씨가 싸늘해졌다. 달콤한 섬다래를 한바가지나 따 온 이 진사에게 보답하려고 병풍바위로 가려던 호실댁은 그를 제 방으로 불러들였다. 감창이 옆방으로 좀 새어나간들 그게 대수랴. 서로 그렇고 그런 걸 다 아는 사실인데. 일벌들이 여왕벌로부터 하룻밤 선택받으려면 먹을 것을 구해 바치는 것뿐인데 북풍한설이 몰아치니 척박한 무인도에서 구할 것이 없었다. 상강 때 섬다래를 얻어먹고 시혜를 내린 후 보름이 지난 입동까지 아무 공물이 들어오지 않자 호실댁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공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시혜를 베풀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어느 날 밤 호실댁은 오 사범을 제 방으로 불러들였다. 오 사범이 호실댁 방문을 빠끔히 열고 머리만 들이민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 “날이 추워 자맥질을 못해요.”
오 사범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호실댁이 오 사범의 상투를 잡아당겼다.
“누가 전복 따 오래?”
호실댁이 오 사범을 덮쳤다.
힘들게 일을 치른 오 사범에게 호실댁이 육포와 볶은 콩을 주자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역전이 됐다. 먹을 것을 받고 치마를 벗던 호실댁이 먹을 것을 주고 바지를 벗겼다. 점점 줄어드는 양식에 밥그릇도 줄어 모두가 주린 배를 움켜잡고 목숨만 이어가는 판이라 종족보존 본능은 쑥 들어가고 자기보존 본능만이 할딱거렸다. 외딴 무인도에 눈이 덮이고 삭풍은 귀를 도려냈다. 양식은 바닥을 드러냈다. 하루 한끼 밥 세숟갈이다. 식량 통제권을 쥔 호실댁은 아직도 오동통했지만, 수컷 넷은 피골이 상접해 반송장이나 다름없고 그나마 사람 몰골을 한 오 사범은 사육당하고 있었다.
결국 오 사범도 길게 가지 못하고 내팽개쳐졌다. 망망대해 무인도가 말없이 북풍한설을 맞고 있었다. 강진현 전라병영에서 수색 군선을 풀었다. 연기를 보고 군선이 배를 대어 동굴로 들어왔다. 삐쩍 마른 남자 다섯이 벌레처럼 기어나오며 한사코 수군들이 굴 속으로 들어가려는 걸 막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수군들이 꺾어진 굴 속으로 들어가다가 놀라서 자빠졌다. 바닥에는 뼈가 흩어져 있고 솥뚜껑을 열자 아직도 팔 하나가 남아 있었다!
최후의 생존자 다섯을 구출해 강진으로 돌아간 수색 군선 선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무인도에 표류한 다섯사람만 살아남았고 여자 하나를 포함한 열아홉사람은 난파선과 함께 수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