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02)짚신장수
자나 깨나 고을 백성 생각뿐인 ‘현감’
어느 날 짚신장수집 앞을 지나는데…
현감에겐 고을 백성이 모두 자기 자식들이고 형제 부모들이다. 이 어질고 덕스러운 현감은 오로지 백성이 근심 걱정 없이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기만 바랐다. 현감은 동헌에 앉아 있을 때가 가물에 콩 나듯 드물었다. 낮이고 밤이고 평복을 입고 구석구석 고을을 헤집고 다녔다. 허름한 도포에 삿갓을 눌러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복을, 어떤 때는 농부처럼, 사냥꾼처럼 변장에 이골이 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마을 골목길을 지나는데 초가삼간에서 가느다란 불빛을 타고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처마 밑에서 발돋움을 해 들창 속을 들여다봤더니 흙벽에 관솔 볼을 켜두고 꾀죄죄한 집주인이 짚더미 속에서 짚신을 삼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신이 났던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손놀림이 쉼 없이 재빨랐다. 그때 마누라가 밤참으로 막걸리 호리병과 도토리묵 몇점을 들고 들어왔다.
“나가지 말고 한잔 따라봐.”
마누라가 옆에 앉아 술을 따르고 안주로 묵 한점을 입에 넣어주자 짚신 장수는 수염에 묻은 술을 한손으로 훔치고 한손은 치마 속으로 쑥 들어갔다. 막걸리 두잔을 마신 짚신장수는 짚북데기 위에 마누라를 쓰러뜨리고 치마를 훌러덩 걷어 올렸다.
현감은 흐뭇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튿날, 고을 장날에 현감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다 어젯밤에 봤던 짚신장수를 또 보게 됐다. 짚신장수는 양손에 짚신을 들고 춤을 췄다. 동짓달 짧은 해가 떨어지자 짚신장수는 좌판을 접었다. 그때 삿갓 처사(?)가 말했다.
“탁배기 한잔하고 싶은데 대작할 사람이 없소.”
두사람은 주막으로 들어갔다. 탁배기잔이 몇순배 돌자 삿갓 처사가 말문을 열었다.
“유기점 주인은 웬 손님과 멱살잡이를 하고 포목점 주인도 팔을 걷어붙이고 싸우던데 그대는 짚신장사하면서 뭣이 그리 신이 나서 춤을 추는 거요?”
짚신장수 오 서방은 낄낄 웃었다.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처자식 배 골리지 않고 웃으며 살려고 일하는 거 아니오? 돈을 한궤짝 묻어놓은들 싸움질이나 하고 마음이 상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요!”
주막을 나오자 눈이 펄펄 내렸다. 한손에는 팔다 남은 짚신을 들고 다른 손에는 간고등어 한손을 들고 짚신장수는 어깨춤을 들썩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삿갓 처사 현감은 많은 생각을 했다. 이튿날 현감은 육방관속과 점심을 하며 짚신장수 얘기를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예방이 “다음 장날 민정시찰 나가실 때 소관도 데려가주십시오” 하자 현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장날, 예방은 관아 출납계에서 돈 천냥을 차입해서 비단주머니에 넣어 평복으로 갈아입고 현감을 따라 민정시찰길에 나섰다. 저녁나절 장터에서 현감과 예방이 멀리서 짚신장수 오 서방이 집에 가려고 좌판 접는 걸 보고 먼저 부리나케 짚신장수집으로 가 사립문 밖 길가에 돈주머니를 떨어뜨려 놓았다. 이웃 담 모퉁이에 숨어서 엿봤더니 짚신장수가 주머니를 주워 두리번거리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짚신장수가 한참 후 다시 나오더니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사방을 살피다가 집으로 들어가기를 몇차례 하는 걸 보고 현감과 예방은 그 자리를 떴다.
다음 장날, 현감은 장터를 비집고 다니다가 짚신장수 좌판에 갔지만 그 자리에 짚신장수는 없고 낯선 장사꾼이 사발을 팔고 있었다. 사발장수 왈, “이 좌판자리를 내가 샀소. 짚신장수는 더는 장사를 하지 않을 거라 합디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현감은 제 눈을 비볐다. 짚신장수가 반짝거리는 것을 쓰고 비단 두루마기에 공단 목도리를 두르고 의젓한 걸음으로 어둠살이 내린 저잣거리를 가로질렀다. 현감이 멀찌감치 따라갔다. 그는 서슴없이 기생집으로 들어갔다. 기생들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오라버니~” 하며 자지러졌다. 며칠 후 현감과 예방이 짚신장수집에 간 날 밤이었다.
“야 이년아, 내가 땟거리를 바닥냈느냐, 방바닥이 왜 냉골이냐!”
“나 죽여라, 나 죽여!”
쾅! 방문이 열리고 그릇을 엎은 채 소반이 마당에 나뒹굴고 요강이 날아와 펄썩 박살이 났다. 짚신 몇켤레 팔아봐야 겨우 한냥이 들어오는데 천냥이 굴러들어왔으니….
이튿날, 예방이 포졸들을 데리고 짚신장수집에 가서 구백쉰일곱냥을 회수해오자 현감이 짚신장수의 좌판자릿값, 깨진 소반과 그릇, 요강값으로 쉰일곱냥을 도로 돌려줬다.
'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03)구두 한짝 (0) | 2022.01.17 |
---|---|
삼국지(三國志) (89) 조조의 출병 (0) | 2022.01.16 |
삼국지(三國志) (88) 황제로의 등극 (0) | 2022.01.15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01)씨도둑질은 못한다 (0) | 2022.01.15 |
삼국지(三國志) (87) 소패왕 손책의 활약상 <하편> (0) | 2022.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