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01)씨도둑질은 못한다
목월행, 딸 신랑감 보는 순간 얼이 빠진 듯 휘청거리더니…
당진 양반촌에 우아한 귀부인이 어여쁜 외동딸과 몸종을 데리고 이사 왔다. 솟을대문에 번듯한 열두칸 기와집을 사서 안방에는 통영 자개농에다가 남종화 열두폭 병풍을 두르고 비단보료에 앉아 사군자를 쳤다. 대감 남편이 이승을 하직하자 그 부인은 한양을 등지고 이곳 당진에 내려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외동딸 은지는 꽃다운 열여섯살, 매파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신랑감들이 나타났지만, 귀부인의 마음이 기울어진 곳은 이 초시네 맏아들이었다. 혼담이 무르익었다.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 열이튿날로 혼례날짜까지 잡았다. 어느 날 신랑의 고모라는 여자가 매파와 함께 귀부인을 찾아왔다. 정중하게 서로 이마가 맞닿을 듯이 인사한 후 다과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대감께서는 어떤 자리에 계셨는지요?”
“승지로 계셨습니다.”
“어느 승지로 봉직하셨는지요?”
“도 승지는 아니고 에…에~우 승지였습니다.”
신랑 고모의 질문에 귀부인은 벌써 땀이 났다.
“고인의 존함이 이자 성자 문자라 하셨지요?”
“네.”
“고성 이씨 무슨 파지요?”
“….”
신랑 고모가 떠나간 후 귀부인은 매파를 불러 다시는 그 집 사람들을 데려오지 말라고 호통쳤다. 보름 후에 매파가 찾아갔을 때는 대문이 잠겨져 있고 인기척도 없었다.
사월초파일, 함평의 혼불사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장 바쁜 사람은 주지스님도 아니요, 상좌스님도 아닌, 여신도회 회장인 목월행 보살이다. 한양에서 내려와 함평에 터를 잡은 그 부자 과부는 종로에서 큰 포목점을 하다가 여동생에게 맡기고 이곳에서 재가불자로 살며 혼불사에 큰 시주를 해 증축 보수로 절을 새로 짓다시피 했다.
목월행 보살이 혼불사의 기둥일 뿐만 아니라 함평의 유지가 됐다. 초파일에 모두가 말했다.
“목월행 보살님, 연등 좀 봐주세요.” “목월행 보살님, 이 시루떡을 어떻게 할까요?”
목월행 보살은 몸은 바빠도 마음은 뿌듯했다. 심지어 주지스님도 혼자 결정 못하고 목월행 보살에게 물어봤다. 그때 “이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목월행 보살이 깜짝 놀라자 온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목월행 보살이 그 여자를 끌고 아무도 없는 산신각 뒤로 갔다.
“너 여기 웬일이냐?”
“나 여기서 멀지 않은 용성리에 살아요. 이모는 여기 웬일이세요?”
열등 아래 탑돌이를 하고 밤늦게 두사람은 함평 읍내로 내려와 목월행 집으로 갔다.
두사람의 기억은 십육칠년 전으로 돌아갔다. 추월관은 제물포에서 가장 큰 기생집이었다. 목월행은 기생의 우두머리인 행수기생이었고 이모라 부르던 여자는 그 아래 기생 동매였다. 두사람은 일년 남짓 함께 일하다 행수기생은 그 집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가 기생집을 차려 억수로 돈을 모았다. 동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내려왔어요, 이모?”
“딸년 하나가 혼기가 차서 멀리 당진으로 내려가 양반행세를 했네. 양반집에 시집을 보내려고.”
그러곤 허허 웃었다. “양반집하고 정혼하고 혼례날짜까지 잡았는데 우리 집 내력을 꼬치꼬치 캐물어 야반도주해서 여기 함평까지 내려왔어. 너는 여기 왜 내려왔느냐?”
동매는 한참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는 아들이 하나 있어요. 눈 밑에 자글자글 주름도 져 고향 용성리로 내려왔지요.”
그러자 목월행이 말했다. “여기서도 종로에서 포목점 한다고 거짓말을 해놓아버려서 들통이 날까 봐 발 뻗고 못 자겠다. 거짓말하고는 못 살아.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오는데 모두 고개를 저었다. 네 아들은 몇살이냐?”
“열다섯이요.”
“지금 뭘 하냐?”
“제 외조부한테서 받은 논밭이 삼백여마지기라 머슴 둘 데리고 농사짓지요. 소작도 주고.”
목월행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 딸은 열여섯살, 동매 아들은 열다섯살, 짝이 맞았다.
어느 날 목월행이 용성리 동매네 집에 놀러갔다. 신랑감을 보려고. 동매 아들이 가까이 오자 목월행은 얼이 빠진 듯 휘청거리더니 쓰러질 듯 동매에게 안겼다. 목월행은 방에 가서 드러누웠다. 놀란 동매가 꿀물을 타왔다.
“저 애 아비가 오 진사냐?”
“어떻게 알아요?”
동매가 깜짝 놀랐다. 제물포의 한량, 오 진사!
목월행의 딸과 동매의 아들은 남매처럼 닮았다. 남매처럼이 아니라 남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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