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의 4大 惡女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
달기(妲己)
상(商/殷)왕조 말기/ BC 11 세기 경/ 주왕(紂王)의 비(妃)
달기(妲己)는 중국 상(商/殷)나라 유소(有蘇) 출신의 여인으로, 훗날 중국 역사상 폭군으로 악명 높은 주왕(紂王)의 애첩이 되는데 중국 역사상 절색(絶色)의 여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인이며, 아울러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도 손꼽히는 여인이다.
상(商)나라 말기의 주왕은 달기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달기는 정실 황후인 강황후의 질투를 받았고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자객 강환이 주왕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달기는 이를 강황후에게 덮어씌우고 자백하라고 눈을 파내는 등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강황후는 사망하게 된다. 은주달기조(殷紂妲己條)에 보면 달기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기름을 바른 구리(銅)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수가 벌겋게 달구어진 기둥위로 맨발로 건너게 하여 미끄러져 떨어져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또 돈분(躉盆)이란 형을 만들었는데 구덩이에 죄수들과 독사와 전갈을 함께 집어넣고 그들이 물려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고도 한다. 주왕은 달기에게 완전 빠져 달기가 하자는 대로 하여 악행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멀쩡한 신하(진상위)의 눈알빼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보기, 한 여름에 뼈가 시려 강을못 건넌다는 노인의 다리뼈를 잘라 골수보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른다.또, 술을 채운 연못 주변에 고기를 걸어둔 숲(酒池肉林)을 만들어서 술에 취한 나체의 남녀가 서로 뒤쫓아 혼음(混淫)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등 날마다 음탕한 밤을 보냈다.충신 구후(九候)는 달기의 악행을 보다 못해 천하절색인 딸을 주왕에게 바쳤는데 달기는 그 딸을 모함으로 죽이고 아버지인 충신 구후 또한 참살한다.
또, 주왕의 숙부이기도 한 재상 비간(比干)이 “선왕(先王)의 전법(典法)을 따르지 않고 아녀자의 말만 따르시니 재앙이 가까울 날이 머지않았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고 하면서 주왕을 부추겨 비간을 죽여 심장을 도려내서 드려다 보았다고도 한다. 충신 비간의 죽음으로 백성들은 상(商/殷)나라에 손톱만큼의 애정도 없어졌고, 주(周)를 중심으로 팔백 제후가 일어나 중국의 두번째 나라였던 상(商/殷)나라는 31 대 주왕(紂王)을 끝으로 왕조의 문을 닫고 마는데 결국 달기라는 여인으로 인해 망했다고 할 것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몰아 쳐들어와 패색이 짙어지자 주왕은 보물이 저장되어 있는 녹대(鹿台)로 올라가 불을 지르고 불에 뛰어내려 자결하는데 주왕(紂王)이 죽은 뒤, 달기도 무왕(武王)에 의해 참수된다. 무왕(武王)은 타버린 주왕의 시체를 가져다 관례대로 목을 치고 주왕의 몸에 화살을 세대 쏘았다고 한다. 첫 화살은 하늘의 명을 거역한 죄로 금 화살, 두 번째는 나라를 망하게 한 죄로 은 화살, 세 번째는 백성을 힘들게 한 죄로 동화살 이렇게 세대를 타버린 주왕의 몸에 꽂았다. 주왕의 애첩 달기도 잡혀 끌려 나왔는데 달기 또한 목이 잘려 역시 화살 세대를 맞고, 주왕의 목과 함께 백기에 걸렸다고 한다.
달기의 처형 때 달기의 미모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묶여 끌려 나오는 그 모습, 눈물까지 흘리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목을 쳐야 할 망나니들이 넋이 빠졌다고 한다. 망나니는 달기의 촉촉한 눈망울을 보면 칼을 든 팔을 부들부들 떨며 끝내 칼을 못 올렸다고 하고 다른 망나니로 교체해도 마찬가지였다. 90세 할아버지 망나니를 내 세웠으나 그 마저 차마 못 쳐서 할 수 없이 달기 머리 위에 비단을 덮어 못 보게 한 후 간신히 목을 쳤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주나라 군대가 조정(朝庭)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주 무왕)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달기를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九尾狐/여우)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포락지형을 받고 죽은 시체를 공동묘지에 내다 묻으면 밤에 달기가 몰래 궁궐 담을 넘어 나와 하늘에 한번 공중제비를 돌면 여우로 둔갑하는데 무덤을 헤치고 불에 그슬린 시체를 파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꺼내 먹는다는...
주나라를 멸망시킨
포사(褒似)
포사 (褒姒 )는 중국 춘추시대 서주의 마지막 왕인 유왕 (幽王 )의 애첩이었다 . 유왕이 그녀는 유왕의 총애를 받아서 아들 백복 (伯服 )을 낳았는데 , 그런데 그녀는 웃는 일이 없었다 . 유왕 (幽王 )은 그녀를 웃도록 하기 위하여 궁리끝에 외적의 침입도 없는데 위급을 알리는 봉화를 올려 제후를 모았다 . 제후들은 급히 달려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포사는 비로소 웃었다 . 유왕은 그녀를 웃기기 위하여 수시로 봉화를 올려서 그녀를 즐겁게 하였으나 회수가 거듭되면서 제후들은 이를 믿지 않게 된다 .
뒤에 유왕은 왕비 신후와 태자 의구를 폐하고 , 포사를 왕비로 , 백복을 태자로 삼았 다 . 후에 신후의 아버지 신후 (申侯 )가 격분해 서기전 771 년 견융 (犬戎 ) 등을 이끌고 쳐들어와 유왕을 공격하자 유왕은 위급함을 알리기 위하여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는 한 사람도 모이지 않아 유왕과 백복은 견융의 칼에 살해되고 서주는 멸망하였다 .
포사 (褒姒 )는 포국 (褒國 : 지금 섬서성 포성 (褒城 )의 남동쪽 ) 의 여인인데 그녀에 출생에 대해서는 흥미있는 전설이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 》에 전하고 있는데 이를 옮겨보도록 하자 . 이야기는 하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하 (夏 )왕조가 쇠미하였을 때 왕궁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 “우리들은 포나라 (褒國 )의 두 군주이다 .” 하나라 임금이 점을 쳤는데 용을 죽이든 내쫓든 그대로 두든 모두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 다시 점을 쳐 보았는데 용에게 타액을 간청하여 그 타액을 저장해 두어야만 비로소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 이에 제물을 차려놓고 그 뜻을 간책에 적어 용에게 보이고 기원하자 용이 타액을 남기고 사라졌 다 . 사람들은 용이 남긴 타액을 작은 상자에 담아 밀봉하여서 흔적을 지워버렸다 .
그 후 그 상자는 하왕조가 멸망하자 상왕조에게 다시 주왕조 3 대에 걸쳐 전해졌으나 아무도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다 . 그런데 주왕조의 여왕말년에 그 상자를 열어보았다 . 여왕은 여자들에게 발가벗고서 그 용의 타액을 향하여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도록 명하였다 . 그러자 용의 타액은 검은 도마뱀으로 변하여 여왕의 후궁으로 기어 들어갔다 . 그 때 후궁에는 이제 막 젓니를 간 예닐곱 살난 어린 계집종이 있었는데 , 우연히 그 도마뱀과 마주쳤다 . 그 계집종은 성장해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 남편도 없는 숫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게 되었다 . 그녀는 두려워 그 아이를 내다 버렸다 . 그 때는 선왕 (宣王 )의 시대였는데 소녀들은 이상한 동요를 불렀다
.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기목 (箕木 )으로 만든 활통 (箭筒 ),
주왕조는 이것 때문에 망하리라 .
그당시 선왕 (유왕의 아버지 )은 이 동요를 들었는데 마침 산뽕나무 활과 기목으로 만든 전통을 팔러다니는 행상인 부부가 나타났다 . 선왕은 그 행상인 부부를 찾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 이 행상인 부부는 도망치다가 후궁의 계집종이 내다버린 여자 아이를 발견하였다 .
그들은 밤에 우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애처로워 그 계집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 두 부부는 포국으로 피신하였다 . 후에 유왕은 포나라를 정벌하였는데 포나라사람들은 요염한 여자를 바치고 용서를 빌었는 데 그 여자는 주나라 후궁의 계집종이 내다버린 계집아이였다 .
그런데 유왕은 선왕이던 아버지 선왕 (宣王 )이 죽자 아들 궁생 (宮湦 )이 즉위하였는데 바로 유왕 (幽王 )이다 . 유왕 2 년 서주의 도읍지와 인근 3 대 하천 유역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 백양보 (주나라의 대부 )가 말하기를 , “주 왕조는 장차 망할 것입니다 . 3 대강 유역에 지진이 잃어난 것은 주나라가 망할 징조라며 10 년 안에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 과연 그 해에는 3 대하천이 메마르고 기산이 무너져 버렸다 .
유왕은 포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정벌에 나섰는데 포나라 사람들은 그 여자아이를 바치었는 데 포인 (褒人 )들이 바쳤기 때문에 그녀를 포사 (褒姒 )라고 불렀다고 한다 . 유왕은 그녀를 보자 한눈에 반하여 그녀에게서 백복이라는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 유왕은 포사를 총애하여서 포사가 다음 해에 아들 백복 (伯服 )을 낳자 유왕은 태자를 폐하려 하였다 .
태자의 모친은 신국 (申國 )의 딸로서 유왕의 왕후였는데 서기전 774 년 유왕은 포사를 사랑하면서 정비인 신후를 폐하고 그 아들로서 태자인 의구 (依臼 )도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책봉하면서 그녀의 소생인 백복도 태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 이에 주나라의 태사 백양보는 역사 기록을 읽으며 말하였다 .
“이제 주나라는 망하였다 . 재난이 잉태되었는데 이를 어쩌랴 !”
그런데 포사는 궁으로 들어온지 꽤 되었는데도 도대체 웃지를 않았다 . 이에 그녀를 사랑하던 유왕은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 사랑하는 사람이 생전에 좋은 내색을 하지 아니하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 그래서 유왕은 이 궁리 저 궁리 온갖 계책을 다 내어서 그녀를 웃기려 온갖 계책을 다 내어보았지만 도무지 웃으려고 하는 기색이 없었다 . 포사를 웃기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상을 내리기도 하였으나 아무도 그녀를 웃기지 못하였다 .
그런데 마침 유왕은 봉화대를 축조하고 커다란 북을 두어 외적이 침입 하였을 때 제후들을 불러 막상 도착해 보니 외적은 고사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 . 이에 지후들은 허탈해하면서 망연자실해 하였다 . 이를 본 포사는 그제서야 모습이 우스웠던지 흰 이를 드러내고 깔깔대며 웃었다 . 유왕은 그렇게 웃지 않았던 포사가 웃자 기쁜 나머지 이를 보기 위하여 계속하여 봉화를 올렸다 . 그러자 제후들은 유왕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어 봉화가 올라가도 제후들은 오지 않게 되었다 .
이어서 유왕은 자신의 말을 잘듣는 곽석보 를 경으로 임명하여서 정사를 주관하게 하니 주나라백성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 석보는 사람됨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첨을 잘 하며 재물을 탐내는 사람이나 유왕이 그를 중용하였다 . 그리고 유왕은 정비 신후와 태자 의구를 폐하니 이에 분노한 그녀의 아버지 신후는 서기전 771 년증국 (鄫国 : 지금의 하남 방성 (河南方城 )과 서쪽의 견융과 손을 맞잡고 서주의 도읍인 호경 (镐京 :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의 유왕을 공격하였다 .
유왕은 처음에는 포사와 음락을 즐기다가 큰 일이 일이 일어난 것도 몰랐다 . 후에 봉화를 올려서 긴급히 군사 동원령을 내렸으나 구원병은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 신후가 이끄는 군사들은 여산 아래에서 유왕과 백복 , 정환공을 살해하였고 포사를 사로잡아 갔고 주왕조의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 제후들은 신후와 의논하여 유왕이 폐하였던 태자 의구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평왕이다 . 평왕은 즉위하여 견융의 침범을 피하여 도읍지를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하였다 . 포사는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고도 하고 피살되었다고도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이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 ․주본기 (史记 ·周本纪 )》에서 ‘포사가 웃는 것을 좋아 하지 않자 주 유왕은 그녀 한 사람의 웃음을 위하여 천하 백성들이 다시는 웃지 못하게 하려고 하다가 결국에 서주는 망하였다 ” 고 하였다 .
그러나 유왕이 포사를 위해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쳤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라 하였고 현대 역사가들은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이에 대한 반론 역시 커 포사의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여씨춘추 (吕氏春秋 )》에는 주나라의 유왕이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쳤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라고 하였다 . 당시 서주의 도읍은 풍과 호경 2 개의 서울로 당시 그곳에는 주나라의 유왕과 제후가 약정하여 대로상에 지은 큰 보루위에 큰 북이 설치되어 있었고 먼 곳이나 가까운에서 북소리를 들을 수 있어 견융병이 침입할 경우 제후들의 군대는 곳 도읍에 천자를 구원하러 올 수 있었다고 한다 .
권력을 위해서 친자식도 살해한
측천무후(則天武後)
중국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일개 궁녀에 불과했었다.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은 후 당시 관례에 따라 다른 궁녀들처럼 비구니가 되었지만, 태종의 아들인 고종과의 은밀한 관계 덕분에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측전무후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왕황후가 자신의 아이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자, 생후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였다.
왕황후를 모함하기 위하여 자식을 도구로 삼은 것이다. 측전무후는 결국 황후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천후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실권은 사실상 측천무후에게 있었다. 황태자를 책봉하는 일에서도 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자신의 친아들이라도 죽이고야 말았다. 황태자를 몇 번이나 갈아치운 끝에 여덟 번째 아들 단이 황제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아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고, 당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며 자신이 최고 황제라고 선포했다.
측천무후는 냉철했다. 그간 악명 높은 ‘악녀’들이 질투 등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움직였다면, 이 여인은 철저하게 권력을 위해 움직였다.
또한 측전무후는 인재등용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분제도에 대하여 한(恨)이 서려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권력에 눈이 멀어, 친자식도 살해하는 냉혹한 여인으로 기억하지만, 비천한 궁녀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수 많은 역경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측천무후는 신분차별,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가 만들어낸 폐해가 아닐까 싶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지금 우리 사회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신분제도’가 얼굴만 바꾼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서태후(西太后)
<청(淸)나라/ 함풍제(咸豊帝)의 비(妃)/ 아명 난아(蘭兒)/ 자희(慈喜)>
만약 인생의 목표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맛보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곳에 살면서 모든 사치를 다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을 받는 것이라면 청나라 서태후는 최고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권력을 잡고 있던 기간은 48 년이었으며, 권력을 독점했던 기간도 무려 28 년이나 되었다.
1835 년생인 서태후는 만족(滿族) 출신으로 그녀의 성은 에호하라(葉赫那拉)이며 어릴 적에는 난아(蘭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가 이때부터는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함풍제(咸豊帝)로 자희는 우연한 기회에 황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지 4 년 만에 마침내 황제의 성은을 입는 행운을 잡는다. 그리고 스물 한 살에 왕자 재순(載淳)을 낳으니 재순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다.
함풍제는 밀려드는 서구열강의 압박(아편전쟁)에 이복동생인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에게 수도의 방위를 위임하고 황후인 자안(慈安), 그리고 자희와 재순 모자만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피한다.
북경에서 황후 자안의 처소가 자금성(紫金城)의 동쪽에 위치하고 자희의 처소가 서쪽에 위치하여 사람들은 황후 자안을 동태후(東太后/慈安皇太后), 자희를 서태후(西太后)로 불렀는데 동태후 자안(慈安)은 영리하고 단호한 성격인데 반해 서태후 자희는 권력욕과 탐욕이 강한 성격이었다.
심약한 함풍제는 도피처인 열하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죽으니 청의 권력구도는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 황후인 자안(慈安), 제 2 황후인 자희(慈喜)와 조정의 대소사를 처리하던 팔대신(八大臣)의 4 대 세력으로 압축되지만 공친왕을 필두로 동태후와 서태후는 팔대신(八大臣)을 숙청하고 향후 20 년 간 삼두체제를 지속하게 된다.
공친왕이 죽자 서태후는 자신의 아들 재순(6세 )을 황제(同治帝)로 앉히나 18세 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다시 3세 인 조카를 황제(光緖帝)로 앉히고 국가의 실권은 두 태후가 거머쥐는데 광서 7년 에 동태후마저 급사하자 서태후가 청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게 된다.
동태후의 죽음은 소문에 의하면, 서태후가 남몰래 남자를 황궁에 불러들여 즐기다 임신을 하는 바람에 동태후가 예부(禮部)와 서태후의 폐후(廢后)를 논의했고, 이를 눈치 챈 서태후가 독이 든 떡을 보내 독살했다고 한다.
광서 24년인 1898 년, 광서제는 대대적인 개혁운동(變法自疆運動)을 벌이나 100 일 만에 실패하자 서태후는 야심가인 원세개(遠世凱)를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를 모두 숙청하고, 광서제를 조그마한 섬 영대(瀛臺)에 감금하는데 광서제는 4 년 후에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서태후는 곧바로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 재풍의 세 살 먹은 아들 푸이(溥儀)를 선통제(宣統帝)로 세우니 청의 12 대, 대청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서태후는 세 번째의 수렴청정을 시도하지만 선통제가 즉위하던 다음날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향년 74 세였다.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와 40 여 년 동안 정권을 휘둘렀던 철의 여인 서태후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이질(痢疾)’이라는 병에 속절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광서제가 죽고 푸이가 정권을 이어받던 다음날 서태후가 숨을 거두었는데 광서제도 결국 서태후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서태후는 끼니마다 100 가지의 요리를 차리도록 했는데 그녀의 한 끼 식비로만 은화 200 냥이 지출되었다고 하는데 이 금액은 당시 서민들 100 명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와의 전쟁이 클라이맥스에 있을 때, 서태후는 거금을 들여 자신의 거처인 저수궁(儲秀宮)을 신축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환갑잔치를 위해서 2 년 전부터 거국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해에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일본군이 대련 항에 상륙해서 대대적인 민간인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 동안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3 일 동안이나 계속된 연회였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서구 열강침략자들에 의지하고자 광서 26 년인 1900 년, 서구열강이 12 개 조의 요구사항을 제출하자 그녀는 별다른 협상절차도 없이 모두 수용했다. 그 결과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보장하기 위해서 주요 재정 수입원인 관세와 염세(鹽稅)는 모두 차압당했으며, 외국군이 주요 도시에 진주하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는 서구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을 탄압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중국사의 가장 큰 굴욕인 신축조약(辛丑條約)이다. 이 와중에도 서안(西安/長安)에 머물던 서태후는 북경에서와 같은 호화판 생활을 계속했다. 하루에 200 냥씩 지출되는 식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웃지 못 할 이야기로 내시(內侍)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이 한 올만 떨어져도 죽였다고 한다. 머리를 빗겨주는 내시는 빠진 황후 머리카락을 몰래 옷소매에 감추기 위하여 머리를 빗길 때에는 옷소매가 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한 내시의 일기에 따르면 한번은 늙은 내시가 실수를 하자 그에게 강제로 사람의 똥을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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