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 악녀?
?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
* 달기(妲己) *
중국 역사에 대한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악녀의 아이콘’ 달기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달기는 중국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애첩으로 미모가 아주 빼어났다고 한다.
달기를 보고 한 눈에 반한 주왕은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의 ‘주지육림’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즐겨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반기를 드는 자가 있으면 ‘포락형’을 내렸다.
‘포락형’ 은 구리 기둥 위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잔혹한 형벌이다.
달기는 주로 고통을 줌으로써 쾌감을 얻는, 새디스트적인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역사적 자료에 달기에 대한 언급이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윤리적인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허구의 인물’ 이라고도 한다.
달기라는 여인이 실존인물이라면, 그것도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달기가 주나라의 ‘명분’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적 인물이라면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 윤리적 타당성을 위하여 또 다른 윤리가 퇴색되어 버리는 일,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사람돼지를 만든
*여태후(呂后)
여태후는 중국 한나라 시조 유방의 조강지처로, 유방이 죽은 뒤 실권을 잡고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사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기 전부터도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왔다.
한나라가 안정을 찾자 여태후는 장래에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하여, 한신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하나씩 ‘처리’ 해 나갔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토사구팽’ 의 유래이다. 유방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자, 여태후는 본격적으로 악랄함을 드러냈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기 전, 자신의 권력을 넘보았던 유방의 첩 척부인을 잡아다가 팔다리와 두 귀를 자르고 눈알을 뽑아버린 뒤 벙어리가 되게 하는 약을 먹여 변소에 던져 놓았다.
그도 모자라 척부인의 아들 혜제에게 보여주며 ‘사람돼지’ 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 후로도 여태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씨 일족을 왕후로 책봉했다.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태후의 ‘국정 운영’ 능력이다. 그녀는 악녀 중의 악녀였지만, 백성들에게는 매우 ‘이상적’이었다.
민생안정 정책을 강화하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여 경제를 회복시키고 사회를 점차 안정시켰다.
그녀는 개인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정책만큼은 유토피아를 꿈꿔왔었는지도 모르겠다.
통치자 혹은 CEO가 최우선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
만약 그녀가 21세기에 태어났더라면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결단력이 남다른’ 통치자나 CEO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권력을 위해서 친자식도 살해한
* 측천무후(則天武後) *
중국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일개 궁녀에 불과했었다.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은 후 당시 관례에 따라 다른 궁녀들처럼 비구니가 되었지만, 태종의 아들인 고종과의 은밀한 관계 덕분에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측전무후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왕황후가 자신의 아이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자, 생후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였다.
왕황후를 모함하기 위하여 자식을 도구로 삼은 것이다. 측전무후는 결국 황후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천후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실권은 사실상 측천무후에게 있었다. 황태자를 책봉하는 일에서도 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자신의 친아들이라도 죽이고야 말았다. 황태자를 몇 번이나 갈아치운 끝에 여덟 번째 아들 단이 황제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아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고, 당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며 자신이 최고 황제라고 선포했다.
측천무후는 냉철했다. 그간 악명 높은 ‘악녀’들이 질투 등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움직였다면, 이 여인은 철저하게 권력을 위해 움직였다.
또한 측전무후는 인재등용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분제도에 대하여 한(恨)이 서려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권력에 눈이 멀어, 친자식도 살해하는 냉혹한 여인으로 기억하지만, 비천한 궁녀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수 많은 역경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측천무후는 신분차별,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가 만들어낸 폐해가 아닐까 싶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지금 우리 사회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신분제도’가 얼굴만 바꾼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 서태후 *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궁녀가 된 서태후는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함풍제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간택된 후부터 그녀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함풍제의 본처 ‘동태후’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함풍제가 죽은 뒤 서태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동태후를 더 좋아했고 황후 간택 문제에서 조차 동태후의 선택을 따랐다.
서태후는 그 ‘억울함’을 사치스러운 생활로 보상받으려 했다. 그녀의 사치스러움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인공호수는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이니 동양의 ‘마리 앙투아네트’ 라는 칭호가 걸맞겠다.
이 여인은 오로지 자신의 ‘사치’를 위하여 청일 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리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고, 국고를 탕진하여 청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나라는 몰락하건 말건 외간 남자를 궁에 들여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곧바로 죽여버렸다.
결정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청나라를 궁지에 빠지게 하면서 역사는 그녀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중국 내에서도 극과 극을 달린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를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외로운 여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청나라를 망친 장본인으로 악녀의 화신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 했지만, 녹록하지 않았을 이 여인의 개인적인 삶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날마다 진수성찬을 즐기고 값비싼 옷을 입었지만,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외로웠을 수도 있겠다.
역사의 평가가 때로는 너무나 잔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