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列國誌 129
** 楚漢誌 51
※ 忠臣 綺信의 殉節
張良이 크게 기뻐하며 綺信을 대궐로 데리고 들어가 漢王에게 綺信으로 하여금 '위장 투항' 하게 할 計策을 告한다.
그러자 漢王은 바로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건 안 될 말씀이오. 나는 大業을 아직 완성하지 못해 수하 장수들에게 아무런 시혜도 베풀어 주지 못하고 있는데, 아끼는 장수를 어찌 나 대신 죽으라고 하겠소?. 남을 죽여 利를 취하겠다는 것은 仁義에 어긋나는 일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綺信이 자진하여 아뢴다.
"대왕 전하 ! 지금 사태가 매우 위급하옵니다. 만약 張良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이 計略을 쓰지 않아 영양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그때는 臣이 살아 있다한들 대왕께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사옵니까 ? 오늘날 臣이 大王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오나, 저로 인하여 영양성을 지킨다면 臣의 美名은 청사에 길이 살아 남아있을 것이옵니다. 이런데도 君臣이 다같이 손 놓고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이옵니까 ?"
綺信이 이처럼 애타게 호소함에도 漢王이 주저하자, 기신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자살할 태세를 보이며,
"대왕께서 臣의 忠心을 이처럼 받아 주지 않으신다면, 臣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 버리겠습
니다."
漢王은 황급히 달려와 綺信의 손에서 劍을 빼앗으며,
"잠깐 .... ! "하고 만류한 뒤,
기신을 가까이 불러,
"장군의 忠心은 하늘을 뚫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구려. 장군의 兩親께서는 아직 생존해 계시오?"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어머니 한 분이 계실 뿐이옵니다."
"그러면 장군의 어머니를 오늘부터 나의 어머님으로 삼고, 내가 모시기로 하겠소. 장군은 妻子도 계시는가 ?"
"예, 있사옵니다.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사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장군의 부인은 나의 누이동생으로 삼고, 장군의 아들은 나의 親 아들로 삼아,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양육을 책임 질 것이니, 장군은 안심하고 뜻대로 해 주시기 바라오."
기신을 위한 이같은 漢王의 감격적인 모습에 동석했던 張良과 陣平도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일단 '위장 투항 전술' 방침이 정해지자, 張良은 榮陽城 앞까지 진군해 와서 陣을 치고 있는 항우에게 한왕의 이름으로 손수 降表를 써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王 劉邦은 삼가 覇王 皇帝 폐하께 머리 숙여 글월을 올리옵니다.>
臣은 일찍이 황제 폐하께 漢王으로 封함을 받고 巴蜀으로 부임 했사오나, 그곳은 산 설고 물 설어서 건강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데다가 고향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여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關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彭城 전투에서 폐하에게 大敗하고 난 後부터는 용기를 상실하여, 지금은 영양성에서 간신히 목숨만 보존해 오고 있사옵니다. 韓信은 東征의 길에 오른 이후로 불러도 돌아오지 아니하고,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도 날마다 떠나가니, 이 어찌 臣의 무능한 소치가 아니오리까?.
이제 폐하께서 사상 초유의 大軍을 일으켜 영양성을 치려하시니, 우리의 운명은 오로지 폐하의 손에 달려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만약 지난날의 情을 생각하시어 제 목숨만 살려 주신다 면, 저는 오늘이라도 투항할 결심이 서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데 폐하께서는 憐憫의 情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劉邦 올림>
項羽는 劉邦의 降表를 읽어 보고 사신에게 물었다.
"劉邦이 언제쯤 城을 나와 항복하러 오겠다고 하던가 ?"
사신이 대답한다.
"폐하께서 허락만 하시면, 오늘 밤이라도 항복하러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항우는 그 대답을 듣고 크게 만족해하며 사신을 즉석에서 돌려보내고,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명한다.
"劉邦이 오늘 밤에 항복을 하러 온다고 하니, 막사 帳幕뒤에 장수 몇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가 유방이 내 앞에서 北面하고 앉아 절을 할 때, 즉시 달려 나와 그 자리에서 목을 치도록 하시오. 그래야만 나의 恨이 풀리겠소."
과연 항우스러운 명령이었다.
이런 命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장수 다섯이 제각기 번득이는 장검을 차고 장막 뒤에 숨어서 한왕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張良과 陣平은 綺信을 위장 투항토록 하는 동시에 漢王이 城을 빠져나갈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대왕께서 먼저 떠나신 뒤, 綺信을 출발시키는 것이 어떻겠소 ?"
張良이 그렇게 말하자 陣平은 손을 저으며 반대한다.
"지금 楚軍이 四方에서 포위하고 있으므로, 대왕께서 성 밖으로 나가셨다가는 큰일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
"綺信 장군에게 袞龍袍(곤룡포 : 왕이 시무를 볼 때 입는 정복)를 입혀 東門으로 내보낼 때, 횃불을 든 미녀 들 5 백여 명을 背行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렇게 하여 楚軍 병사들의 눈을 현혹시키면 병사들이 모두 東門으로 몰릴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平服으로 갈아 입으신 후 西門으로 빠져 나가시면 무사하실 것이옵니다."
陣平도 워낙 계교가 비상한 사람인지라, 그의 절묘한 計略에는 張良도 감탄하지 않을수가 수가 없었다.
이윽고 綺信이 漢王으로 분장 하고, 5 백 여 명의 侍女들을 앞뒤로 나누어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게 하고 東門 밖으로 나서니, 楚軍 병사들은 漢王이 탄 수레보다 저마다 미녀들 주변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漢王은 그 기회를 틈타 막료들을 거느리고 西門으로 빠져나와 멀리 成皐城(성고성)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항우는 초저녁부터 유방이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종이 달려오더니,
"유방이 이제야 오고있사온데, 앞 뒤로 미녀 5 백 명씩이나 거느리고 오는 중이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 아닌가 ?
항우는 그 말을 듣자 소리내어 웃었다.
"으하하하, 劉邦이 본래 色을 무척 밝히는 줄은 알고 있지만, 항복하러 오는 주제에 계집을 5 백명 씩이나 데리고 오다니, 그 者가 맛이 가긴 완전히 가버린 모양이구나."
그러면서 항우 자신도 미녀들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지라, 몸소 횃불을 밝혀 들고 영문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유방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미녀들과 함께 유유히 수레를 타고 오는데, 항우가 마중을 나왔는데도 수레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저런 무례한 놈이 있나? 감히 내 앞까지 수레를 타고 오다니, 저놈이 제정신인가 ?)
항우는 매우 괘씸하게 여기며 수레 앞까지 다가갔지만,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말이 없었다.
항우는 적지않게 의아스러워 수레 안을 향하여
"漢王 劉邦은 항복하러 왔으면서 어찌 아무런 말이 없는가 ?"
하고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수레에 앉은 사람은 그제서야 반쯤 가려진 휘장을 손으로 올리고 밖을 내다보면서,
"나는 漢王이 아니고 漢나라의 대장 綺信이니라 ! "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
항우가 횃불로 수레를 자세히 비춰 보니, 수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곤룡포를 입고 모습 또한 유방을 닮았으나 劉邦이 아닌 것은 확실하였다.
"아니 ! 너는 누구냐 ?"
항우는 감쪽같이 속은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며,
"이놈아 劉邦은 어디 가고 네 놈이 왔느냐 ! "
하고 대갈일성을 질렀다.
그 호통이 얼마나 컸던지 5 백 여 명의 미녀들이 한꺼번에 "아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는 짧은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수레에 앉아 있는 綺信은 항우를 毅然히 굽어보며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漢王 대신 죽으러 온 사람이다. 대왕께서는 그대가 없는 사이에 彭城을 치려고 韓信, 英布, 팽월 장군 등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조금 전에 彭城을 치러 떠나셨다. 팽성을 점령하게 되면 그대의 가족들은 결코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항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 오늘 낮에 보내 온 降表는 새빨간 거짓이었단 말이냐 ? "
"물론 그렇다. 지금이라도 용기가 있거든 廣武로 달려가 자웅을 결해 보라. 그러면 제아무리 '力拔山 氣蓋世'라고 폼잡는 그대라도 우리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항우는 눈앞에 닥친 죽음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綺信의 충성심에 한편으로는 내심 놀라면서,
"도대체 劉邦에게 이렇게 충성스러운 너는 누구냐 ?"
그러자 季布가 항우에게 말한다.
"이자는 漢軍 대장 綺信이라는 자이옵니다. 당장 끌어내려 목을 베라는 命을 내려 주소서."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한다.
"나도 비록 많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이 者와 같은 충신은 본 일이 없도다.
저 자를 죽이기는 그의 忠心이 아까우니, 잘 타일러 내가 쓰고 싶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잘 설득해 보도록 하여라."
이렇게 말을 한 항우는 수레를 향하여 타이르는 어조로,
"그대의 충성심은 가히 본받을 만 하구나. 내 이제 그대에게 이르노니, 수레에서 내려와 나에게 항복 한다면 내가 그대를 크게 쓸 것이다."
그러자 기신은 수레 위에서 항우를 毅然히 굽어보며 큰소리로 꾸짖듯이 말한다.
"항우는 듣거라, 너는 워낙 산돼지 같이 포악한 자가 아니냐? 내 어찌 너같은 무식한 자를 섬긴단 말이냐 ? 너는 "忠臣은 不事二君"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구나?
내 목이 열 번 잘리는 限이 있더라도 짐승만도 못한 너에게 굽힐 내가 아니다. 나는 살아서도 漢王의 신하였지만, 죽어 서도 漢王을 위해 너같은 무도한 者를 없애는데 힘을 다 할 것이니 헛 소리 그만 집어치고 어서 죽여라."
(鄭夢周의 丹心歌와 成三門의 忠節歌가 문득 떠오른다. )
그 말을 들은 항우는 불같이 怒하여,
"저 놈을 즉시 수레에 탄 채로 태워죽여라 ! "
이윽고 수레에 기름이 뿌려지고.. 불길이 뜨겁게 타 오른다.
그러나 수레에 타고 있는 綺信은 온 몸이 불에 타 죽어가면서도 비명은 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