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31)동곳
죽마고우 임 초시와 하 진사 딸·아들 낳은 후 사돈 약조
병든 임 초시·부인 세상 뜨고 18세 딸 초선이 홀로 남는데…
강원 영월에 사는 임 초시와 하 진사는 둘 다 점잖고 학문이 깊어 뭇사람들이 우러러봤다. 두 사람은 죽마고우로 장가를 가서도 자주 어울렸다.
임 초시가 먼저 딸을 얻고, 이태 후 하 진사는 아들을 낳았다. 임 초시 딸 초선과 하 진사 아들 국은 꽃처럼 달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날, 하 진사가 집에서 걸러낸 국화청주 한 호리병을 들고 다섯살 국의 손을 잡고 임 초시네 집에 찾아왔다. 술이 얼근히 취했을 때 색동옷을 입은 일곱살 초선이 어란 접시를 들고 사랑방으로 들어오자 하 진사가 “우리 며느리 예쁘기도 하지” 하며 유건을 벗고 호박 동곳(상투가 풀어지지 않게 꽂는 손가락 두마디 길이의 장식)을 빼 초선의 손바닥에 쥐여줬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임 초시와 하 진사는 사돈 약조를 맺었다.
십년 세월이 흘렀다. 임 초시가 병석에 누워 백약을 써도 차도가 없었다. 삼년을 끌자 임 초시네 문전옥답이 야금야금 남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열두칸 기와지붕 위에는 와송이,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비가 오면 대청에 빗물받이를 놓았다. 집을 담보로 저잣거리 돈놀이 영감으로부터 빚을 쓰다가 한도가 찼을 때 임 초시가 이승을 하직했다. 남편을 병시중하느라 폭삭 늙은 임 초시 부인도 한해를 못 넘기고 뒤따라갔다. 열여덟살 초선이 혼자 남았다.
그러자 하 진사의 아들 국이 초선을 찾아와 적지않은 돈을 놓고 가고 하인을 시켜 쌀자루도 날랐다. 장대비가 끝없이 퍼붓고 천둥번개가 세상을 깨뜨릴 듯이 요란하게 치던 어느 날 밤, 국이 술에 취해 초선을 찾아와 “나는 내일 공부하러 한양으로 올라가오. 내년 봄에 급제하면 내려와 혼례를 올리리다” 하고 호롱불을 껐다.
“안됩니다!” 초선이 소리치며 은장도를 빼들었지만 국은 발정 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비린내가 확 풍기고 조용해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초선이 호롱불을 켜고 확인해보니 국의 왼 팔뚝이 세치쯤 자상을 입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초선이 얼른 속치마를 찢어 팔뚝을 매자 피는 금세 멈추었다. 국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초선도 울었다. 국이 초선을 껴안을 때 초선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꽈르르~ 꽝!’ 칠흑처럼 깜깜한 밤, 천둥번개가 칠 때마다 창문은 새하얘지고 벌거벗은 두 몸이 엉켜서 꿈틀거렸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국은 “부디 몸조심하시오” 이 한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일어나 호롱불을 켰더니 은장도에 베인 국의 피와 천지가 열린 초선의 피가 한데 어울려 요가 붉게 물들었다. 초선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일어나 뒤뜰 우물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국이 급제하게 해달라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가을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가슴 철렁한 소문이 돌았다. 하 진사네 맏아들 국이 한양서 내려오자 중신아비들이 들락거리며 신붓감을 찾는다는 것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년 하고도 오년이 더 흘렀다. 저녁나절 황해도 해주의 노을진 광석강나루터, 마지막 배에서 내린 객손들이 주막으로 들어갔다. 이튿날이 해주 장날이라 주막집은 분주했다.
맨 구석 독방을 차지한 손님은 다른 장돌뱅이들과는 차림새부터 달랐다. 말끔한 두루마기에 갓을 썼지만 선비가 아니라 우황과 웅담을 팔러다니는 별난 약재상이다.
부엌데기가 차려준 개다리상을 주모의 딸 명주가 들고 구석방에 갔더니 그 약재상이 말했다. “나는 여기 해주 땅이 초행인데 너를 어디선가 본 것 같구나.” 명주가 답했다. “저도 어르신을 뵌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뚫어지게 서로를 쳐다봤다.
손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에 주모가 없어졌다. 주모 딸 명주가 제 어미 방에 들어갔더니 누워서 울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깜짝 놀란 명주가 제 어미 머리맡에 앉아 물었다. 주모가 “뒷방, 갓 쓰고 온 사람에게 갖다줘라” 하며 조그만 비단 주머니 하나를 줬다. 명주로부터 비단 주머니를 받아든 약재상이 비단 주머니를 풀자 그 속에서 호박 동곳이 나왔다. 갑자기 와락 명주를 뼈가 부서져라 껴안더니 “너는 내 딸이구나!” 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었어요.” 명주도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십오년 전, 한양에서 과거에 낙방하고 낙향한 국은 더는 과거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초선과 혼례를 치르고 천석꾼 부잣집 맏아들로 집안을 챙기며 평범하게 살려고 했는데, 하 진사의 안방마님이 한사코 망한 집안의 혈혈단신 딸을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고 매파들을 풀어 신붓감을 찾았다. 그 소문을 듣고 초선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한해 동안 초선을 찾던 국은 할 수 없이 부모 뜻에 따라 이웃 고을 문 참사의 딸과 혼례를 올렸지만 첫아이를 낳다가 사산하고 산독으로 아내도 이승을 하직했다. 그 길로 국은 우황과 웅담장사를 한다는 핑계로 주유천하를 한 지 어언 십년이 훌쩍 넘었다.
해주의 주막을 정리하니 풀벌레 우는 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세 사람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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