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21)혼례날, 사라진 신랑
괴승에게 붙잡혀 산속 끌려간 신랑
건네받은 쪽지 어머니께 전하니…
이 진사의 삼대독자와 이웃 고을 유 대인네 외동딸의 혼례날이 밝았다. 혼례식을 올릴 신부 집이 삼십리나 떨어져 있어 신랑은 해 뜨기 전에 일찍 떠나가야 하는데 신랑이 없어졌다. 이 진사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마당에는 신랑이 타고 갈 나귀가 온갖 치장을 한 채 마부 손에 잡혀 있고, 그 뒤로 신부 집에 가져갈 고리짝들이 늘어섰으며 그걸 메고 갈 하인들이 국밥을 먹고 나와 웅성거리고 있다가 집사의 명으로 이 집 도련님을 찾아 흩어졌다.
혼례식에 갈 친척과 친구들도 신랑을 찾아 동네를 샅샅이 헤맸지만 허사였다. 신랑 방에는 신랑이 입고 갈 사모관대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진사는 넋이 빠진 중에도 집사를 신부 집으로 보내 사시에 치르기로 한 혼례식을 오시로 미루자는 전갈을 보냈다. 유 대인의 집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거창한 혼례식을 보려고 모였던 발 디딜 틈 없는 구경꾼들 사이에서도 이상한 말들이 오갔다. 사시가 아니라 신시를 지나 땅거미가 내려앉는 유시가 돼도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랑의 행적을 좇았다. 전날 밤 왁자지껄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주막에서 술을 몇잔 마시고 나와 집 대문을 행랑아범이 열어줘 안마당을 가로질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새벽같이 일어난 행랑아범이 대문의 걸쇠가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밤중에 신랑이 집을 나갔단 얘기다. 도대체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삼대독자 열여섯살 신랑은 이튿날 치를 혼례식을 머리에 그리며 달콤한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소쩍새 울음소리만 적막을 깨는 삼라만상이 잠든 사경, 오싹한 서늘함에 신랑이 눈을 떴다. 달빛에 창호가 하얗게 바래 방 안의 사물이 구분됐다. 시퍼런 단검이 신랑의 목을 누르고 괴승의 백호 친 머리가 번들거렸다.
“모, 모, 목숨만 사, 사, 살려주십시오.”
입에 수건으로 재갈이 물리고 손이 뒤로 묶인 신랑이 앞서고 괴승이 포승줄을 잡고 밤이슬을 맞으며 산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갔다. 돌부리에 차이고 첨벙첨벙 개울을 건너 동녘이 틀 무렵 폐허가 된 암자에 도착했다. 조그만 법당은 풍상에 폭삭 내려앉아 잡초만 무성하고 그 아래 세칸짜리 요사채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문짝은 떨어져 널브러졌다. 괴승이 신랑 입의 재갈을 풀어줬다. 신랑은 요사채 쪽 마루에 앉았고 괴승은 감회가 새로운 듯 폐허가 된 암자를 구석구석 훑어보며 어느 곳에서든 발길을 떼지 못하고 상념에 젖어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토했다.
“스님, 돈을 원하시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괴승은 등을 보인 채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당께서는?”
처음으로 괴승이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님 말입니까. 잘 계십니다.”
괴승은 또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스님, 제 어머니를 아세요? 스님, 여기 암자가 허물어지기 전에 이곳에 계셨어요?”
신랑이 뜸을 들여 물어봐도 괴승은 등을 돌린 채 한마디 대답이 없었다.
하루해가 기울었다. 괴승은 바랑 망태 속에서 미숫가루를 꺼내 한 발우를 마시고 신랑에게도 타 줬다. 요사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신랑이 한숨 자고 눈을 뜨니, 바랑 망태를 베고 괴승이 입고 있던 장삼을 덮고 있었다. 괴승은 신랑 머리맡 방구석에 기댄 채 자고 있었다. 괴승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삼일 만에 괴승과 헤어져 산에서 내려오며 신랑은 생각에 잠겼다. 헤어지기 전 괴승이 자신을 꼭 껴안아줬을 때 무언가 알 수 없는 따듯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자 유 대인 댁으로부터 파혼 통보를 받은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삼대독자가 살아서 돌아왔다며 이 진사네는 잔칫집 분위기가 됐다. 신랑은 괴승이 시키는 대로 산적들에게 납치돼 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둘러댔다.
며칠 후 몰래 안방의 어머니를 찾아 괴승이 준 꼬깃꼬깃 접어 밀봉한 쪽지를 건넸다. 어머니는 화들짝 놀랐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진사의 안방마님은 그날 한숨도 못 잤다. 십육년 전,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산신암에 가 백일기도를 올린 일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산신암은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소문나 아이 못 낳는 여인네들이 많이 찾아왔었다. 어머니가 괴승으로부터 받은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백일기도를 하고 딸을 낳아 그 딸이 혼기가 찬 집 유기천 대인 댁, 허달 초시 댁, 오진택 참사 댁.’
오싹 소름이 끼쳐 오들오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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