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93)고갯마루 묵집 과부
묵집 과부, 조심스레 동네로 내려가 유 대감 맏아들인 유 진사 만나…
다음날부터 문상객들로 고을 들썩
발인 날 밝아 상여행렬 움직이는데 한 만장 글귀에 아수라장 되고…
고갯마루 초가삼간 묵집은 장날만 장사꾼들로 제법 붐비고 평소엔 파리만 날렸다. 대낮에 묵집 과부가 장지문을 잠그고 사립문도 잠근 후 장옷을 깊게 눌러 쓴 채 종종걸음으로 고개를 내려갔다. 그녀는 바로 동네로 가지 않고 산언저리를 돌아가는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도둑처럼 좌우를 살피더니 유 대감댁 대문 안으로 스며들었다. 안채 건넛방에서 유 대감의 맏아들인 유 진사 앞에서 묵집 과부는 장옷을 살짝 내려 얼굴만 반쯤 드러낸 채 몇마디 소곤거리자 유 진사가 사색이 돼 털썩 주저앉았다.
묵집 과부가 앞장서고 유 진사 형제와 유 진사 아들이 뒤를 따라 고갯마루 묵집에 다다랐다. 검은 치마로 장막을 치고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방 한가운데 놓인 흰 광목을 벗기자 유 대감이 잠이 든 것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둘둘 말아 준비해간 광목 끈으로 묶고 부목을 대서 시신을 들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산길을 돌아 집 근처로 갔다. 유 진사가 등을 떠밀어 묵집 과부도 함께 갔다. 유 진사 아들이 날렵하게 담을 넘어 머슴들 방, 하녀들 방을 살폈다. 새벽부터 가을걷이한 탓에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살며시 대문을 열고 들어가 사랑방에 유 대감을 눕혔다. “꼬끼오~” 새벽닭이 울자 “아이고~ 아이고~” 사랑방에서 일제히 곡소리가 터졌다.
그 시간, 유 진사의 아들과 동생은 무거운 자루 하나를 메고 나루터 근방에 와 돌멩이를 자루에 잔뜩 넣었다. 나루터 옆, 뱃사공 오두막집 창을 두드리자 뱃사공이 볼멘소리로 “해가 솟아올라야 첫배가 뜹니다요” 하며 짜증을 냈다. 유 진사 동생이 뱃사공 손바닥에 엽전을 넘치게 쥐여주며 말했다. “저 자루를 강 한복판에 던져주게.” 깜짝 놀란 뱃사공이 바지춤을 올리며 밖으로 나와 나룻배 위에 자루를 싣고 새벽안개가 자욱한 강으로 노를 저었다.
날이 새자 유 진사댁은 장례준비로 부산해졌다. 넓은 마당에 가림막이 쳐지고 안채에서는 상복을 짓느라 부산하고 대청엔 빈소가 차려지고 글 잘 쓰는 오 초시가 사랑방에서 부고를 쓰고 하인들은 파발마처럼 부고를 품에 넣고 흩어져 내달렸다.
일찍이 장원급제를 하고 대제학까지 했던 유 대감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이승을 하직하자 온 고을이 부산해졌다. 임금님이 도승지를 보내 문상을 했고 팔도강산 유림들이 문상을 왔고 고을 사또는 육방관속을 데리고 와 상갓집 집사 노릇을 했다. 문상객마다 “그렇게 정정하시던 대감께서 어쩌다가 하룻밤 사이에?”라고 물었다. “급체로 손 쓸 틈도 없이….” 구차스럽게 답하는 상주는 괴로웠다.
발인 날이 밝았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을날, 상여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알록달록한 만장(輓章)이 가을 하늘을 덮었다. 조문객과 구경꾼들이 끝없이 상주에게 다가와 귓속말하자 상주 유 진사가 만장 하나를 보고 기절해 쓰러졌다. ‘극락왕생(極往生) 복상시대감(腹上屍大監)’. 그 만장을 유족들이 부랴부랴 빼앗았지만 볼 사람은 다 봤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상주는 기절하고 상여행렬은 아수라장이 됐다.
복상사 만장을 들었던 열세살 거지 아이가 둘째 상주에게 멱살이 잡혀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 만장은 어떻게 구해서 들고 왔느냐?” 눈알을 부라리자 울상이 된 거지 아이가 대답했다. “어젯밤 대장간 화덕 옆에서 거적때기를 덮고 자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을 입은 여자 귀신이 엽전 한움큼과 그 만장을 주며 오늘 상여행렬에 따라가라 하더라고요. 꿈인 줄 알았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그 만장이 내 품속에 있어서….”
밤새도록 가을비가 오더니 아침에 쨍하게 해가 떴다. 유족들이 삼우제를 지내려 유 대감 묘소에 갔다가 상주들이 또 기절했다. 묘비 꼭대기 빈칸에 ‘복상시대감(腹上屍大監)’이라 음각돼 있었다.
대낮에 고갯마루 묵집에 가서 술 한잔 마신 유 대감이 묵집 과부 배 위에서 객사하자 집안 수치라며 그걸 감추려고 복상사 당사자이자 유일한 목격자 묵집 과부를 재갈을 물려 자루에 쑤셔 넣어 수장시키려 했는데 뱃사공이 자루가 꿈틀거리는 걸 알고 수장시킨 척하고 묵집 과부를 살려냈다. 묵집 과부가 평생 모은 돈 반을 뚝 잘라 뱃사공에게 주고 거지 아이에게 복상사 만장을 들게 하고 비 오는 밤에 석공에게 큰돈을 주고 유 대감 비석에 글을 새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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