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91)착한 도둑(하)

jahun 2022. 1. 5. 22:24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91)착한 도둑()

좀도둑 천석을 집에 데려온 선비, 자신을 사부님이라 부르라 하는데
 
저희가 나리의 사업을 망쳤다니요? 우리는 그런 적이 없는데.
침묵이 무겁게 방 안에 깔렸다.
앞으로 나를 나리라 부르지 말고 사부님이라 부르고 거처를 뒤꼍, 초당으로 옮겨라.
초립동은 검은 선비의 말에 토를 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가 돌봐야 하는 두아이가 다리 밑에 살고 있는데 초당으로 데려와 함께 살아도 될.
안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랐다. 초립동은 다리 밑으로 갔다. 거지 아이 두녀석이 얻어온 밥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너희 둘은 여기서 살아라. 나는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자, 두녀석이 울상이 되었다.
이튿날 밤 초립동은 검은 선비와 검은 개, 검은 매와 함께 뒤뜰에서 훈련을 했다. 초립동도 몸이 가볍고 빨라 저잣거리에서 또래들과 싸워서 진 적이 없는데 검은 선비는 번개였다. 여덟 자 담을 가볍게 넘고 축지법을 쓰듯 여기저기 휙휙 날아다녔다. 손짓과 휘파람소리에 검은 개와 검은 매가 검은 선비 뜻대로 움직였다.
초립동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몰랐다. 검은 선비는 집에서 자는 날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초립동이 이 집에 온 지 한달여 만에 안방마님을 마주하게 됐다. 스무살이 채 안된 앳된 얼굴에 수심이 꽉 차 보였다. 마님이 보자기를 풀어 초립동에게 광목 조끼를 건넸다. 초립동이 황공하여 어쩔 줄 모르자 손수 입혀주는데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가을 햇살이 듬뿍 내려앉은 초당 툇마루에 앉아 안방마님이 이것저것 물어봐 초립동이 솔직하게 얘기하자 살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사람을 이 길로 끌어들이다니…”라 말했다. 아직도 초립동은 이 길이 무엇인지 몰랐다. 며칠 후 초립동이 다리 밑으로 갔다. 두녀석이 조끼를 입고 있어 물었더니 젊고 예쁜 마님이 갖다주더라면서 떡도 얻어먹었다 했다. 초립동 가슴이 찡해졌다.
두달이 지난 어느 날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검은 선비는 초립동과 검은 개, 검은 매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삼십리 밖 동촌에 다다르자 이경이 되었다. 산을 등진 큰 기와집 뒤,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숨을 가다듬은 후 날아오르듯이 높은 소나무에 올라 집 안을 내려다봤다. 잔칫날을 앞뒀는지 집 안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 말소리도 들렸다. 삼경이 무르익자 집 안에 불빛도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검은 선비는 천석이를 담 앞에 바짝 세우더니 두발로 어깨를 밟고 집 안을 살피다가 나비처럼 사뿐히 담 안으로 내려앉았다. 뒷담 쪽문을 여니 천석이도 들어갔다. 검은 개는 뒤뜰 별당 툇마루 밑에 들어가 웅크리고 검은 매와 검은 선비는 안채로 잠입했다. 한참 후 비명소리에 천석이는 안채 들창 아래서 절구통을 딛고 방 안 동태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검은 선비가 안주인을 겁탈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그 집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검은 선비가 사랑방에서 강도질해온 귀금속을 펼쳐놓았다. 금비녀 세개, 금팔찌 두개, 비취옥노리개 하나, 금반지 다섯개. 혼수준비를 하던 신부 측 혼례품을 몽땅 털어온 것이다. 신부 어머니를 겁탈해서 입막음까지 한 셈이다. 초립동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죽은 사부 영감님과 초립동이 사업을 항상 망쳐놨다라는 말의 뜻도 그제야 알았다. 혼인날을 받아놓은 부잣집을 검은 선비가 주도면밀하게 노리고 있을 때 어설픈 좀도둑이 그 집에 들어가 주인의 경계심을 바짝 올려놓아 일을 망쳤다는 얘기다.
어떤 때는 혼수준비하는 집 삽살개가 달려들고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와 검은 개가 삽살개를 막아 싸우고 검은 매는 하인의 눈알을 발톱으로 쪼아 무사히 도망쳤다. 한번은 혼수준비를 하는 부잣집에 들어가기 전에 검은 선비가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더니 대통을 돌려 뺀 후 물부리를 물고 ~하고 불자 뒤뜰을 어슬렁거리던 개가 펄쩍 뛰더니 잠시 후 쓰러졌다. 그걸 보고 초립동은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해졌다. 사부님 영감님도 독화살을 맞고 즉사했지! 주인집에서 쏜 게 아니라 바로 검은 선비가!
초립동이 이 집에 온 지도 삼년, 호시탐탐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는데 저절로 해결됐다. 어느 봄날 밤,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와 오랜만에 안방을 찾은 검은 선비가 복상사했다. 폭풍우가 몰아친 후 구름 위에서 떨어질 때 안방마님이 독침으로 검은 선비의 귓속을 살짝 찔렀던 것이다. 열여덟 건장한 청년, 초립동이 그 집을 떠나려 하자 안방마님이 그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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