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64)그믐달<상>
그믐달 뜬 새벽녘 회나무 아래서 조촐한 회동을 가지는데…
새벽이 가까워진 오경, 동구 밖 마을 어귀에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노거수(老巨樹) 회나무 가지 끝에 그믐달이 걸렸다. 우수가 지났다지만 서리가 내려 쌀쌀하게 매운 공기가 코끝을 찌르는 그 새벽에 뻗정다리 도 영감이 목발을 짚고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회나무 아래 평상으로 다가갔다.
미리 와 있던 노 첨지가 “어서 오게” 하며 부축해서 앉혔다. 뒤따라 큰 키에 아직도 비단 마고자로 멋을 부리는 오 참봉이 호리병을 들고 왔다.
“모두들 별고 없지로….” 도 영감이 조끼 주머니에서 유지로 싼 전을 꺼내고 노 첨지도 술안주로 육포를 꺼냈다. 세 노인은 먼저 술을 따르고 안주를 펼쳐놓은 후 회나무에 절을 두번 올리고 잔을 돌렸다. 독주가 돌아가고 고개를 젖혀 마시고는 “카아” 하며 그믐달을 쳐다봤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립네.” “그려.”
그들은 가끔씩 말을 뱉어냈지만 시선은 그믐달에 꽂혀 있었다. 동녘이 어둠살을 조금씩 벗겨내자 동쪽 하늘에 걸려 있던 차가운 그믐달이 희미해지고 세 노인의 시선도 아래로 떨어졌다.
뻗정다리 도 영감만 장애인이 아니다. 술자리를 치우는 노 첨지의 손은 열손가락 중 손가락이 세개밖에 남지 않았고, 오 참봉은 도랑가에서 바지춤을 내리고 여자처럼 쪼그려 앉아서 오줌을 갈겼다. 양물이 잘려나간 게 틀림없다. 세 노인은 각자 흩어져 마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 노인의 회나무 아래 그믐달 회동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 마을 이름이 당산골이듯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칠백년 노거수 회나무는 신목(神木)으로, 정월대보름에는 온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목 회나무 아래 모여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빌며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뿐만이 아니다. 무당도 와서 신기를 받아가고 지관도, 관상쟁이도, 점쟁이도 영험함을 달라고 이 회나무에 빈다. 모든 이들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아들 낳게 해달라고 이 신목에 매달린다.
그런데 당산골 세 노인은 왜 만물이 잠자는 새벽녘에 와서 조촐한 제사를 올리고 하염없이 그믐달을 바라보는가? 하필이면 그들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희망의 상징 초승달과 꽉 차오른 부귀와 풍요를 의미하는 보름달을 외면하고 곧 사라질 절망의 그믐달을 흠모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믐달은 매달 스무이레, 스무여드레(음력 27, 28일) 단 이틀, 그것도 새벽녘 동쪽 하늘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날이 밝아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보기 힘든 쇠락의 달이다. 절름발이 도 영감, 열손가락 중에서 세손가락뿐인 노 첨지, 양물이 없는 오 참봉, 이 세노인의 지난 세월을 되감아 돌려보자.
오십여년 전, 당산골 서당은 낭랑한 <천자문> 읽는 소리로 봄을 맞았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
훈장님의 선창에 학동들이 소리 높여 따라 읽는데 도영복은 두손을 뻗쳐 빗자루를 들고 꿇어앉았다. 다른 학동의 먹을 훔쳐 자신의 짚신 속에 숨겨뒀다가 한 학동의 고자질로 들통이 나 훈장님으로부터 회초리 타작을 당하고 벌까지 서고 있었다. 도영복의 도둑질 솜씨는 호가 났다. 다른 학동들 조끼 주머니에 도영복의 손이 들락날락해도 당사자는 알지 못했다. 학동들뿐만이 아니다. 훈장님 안방의 장롱서랍도 도영복의 신출귀몰한 솜씨에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참외·수박서리도 도영복은 차원이 달랐다. 수박을 훔쳐서 친구들과 먹는 게 아니라 장에 갖다 팔았다.
당산서당의 또 다른 말썽꾸러기는 오대근이다. 마빡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여자를 밝히는 것이다. 물동이 이고 가는 처녀 뒤에서 치마 올리기가 시들해지자 뒷집 하녀와 짜고 여름밤에 하녀가 뒤뜰 우물에서 발가벗고 멱을 감으면 미리 토란밭에 매복해 있던 학동들이 침을 흘리게 하고 관람료를 받아 이튿날 하녀와 나눠 가졌다.
당산서당엔 글공부와 담을 쌓은 학동이 도둑질 선수 도영복, 여자 밝히는 오대근, 그리고 또 한 녀석이 있었다. 내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노동천이다. 책 보따리에 언제나 윷과 윷판을 싸다니다가 서당을 마치고 집에 갈 때 밭둑에서도, 솔숲 속에서도 윷판을 벌리는데 민윷은 없다. 한푼이라도 돈을 걸어야 판에 낄 수 있었다. 윷판이 시들해질 쯤 노동천은 어디서 구했는지 골패를 들고 왔다. 어른들이 하는 진짜 노름기구다. 서당학동들 사이에 골패 열풍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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