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59)파계

jahun 2021. 12. 4. 18:19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59)파계

 

삼대독자 아들을 껴안은 조대인, 사흘 동안 눈길을 헤친 끝에 산속 한 절에 도착하는데…
 

포대기에 싸인 두살배기 삼대독자 아들을 껴안은 조 대인의 가마가 까닥까닥 눈길을 헤쳤다. 집을 떠난 지 사흘째, 저녁나절에 산허리를 돌자 건너편 산속의 절간에서 저녁연기가 올라오고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무릎을 덮은 눈을 헤치고 일주문을 지나 마침내 법당 마당에 닿자 가마꾼들의 벅찬 숨소리가 정적을 깼다. 비구니들이 모여들고 비구니 주지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가마에서 내린 조 대인이 합장을 했다. 조 대인은 요사채에 모셔져 정갈한 저녁상을 받았다.

주지스님 방에는 귀밑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앳된 사미니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꿇어앉았다. 주지스님이 긴 한숨 끝에 정적을 깼다. “입산하기 전의 속명이 일지라 했던가?” 사미니는 모깃소리만 하게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정적이 이어졌다. “일지는 지금 당장 사미계를 거둬들이고 재가불자로 돌아가거라.” 사미니는 방바닥에 엎드려 끝없이 흐느꼈다.

늦은 밤 사미니는 주지스님 손에 이끌려 조 대인이 머무는 요사채에 들어갔다. 조 대인이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사미니에게 건네자 으스러질 듯이 끌어안고 또 울기 시작했다. 아기가 깨어나 울자 사미니는 방구석에 돌아앉아 승복을 걷어 올리고 젖꼭지를 물렸다. 주지스님은 물러가고 아기는 잠들고 뒷산에 부엉이 소리만 들리는 깊은 밤, 사미니 일지는 조 대인의 품에 안겨 또 흐느꼈다.

눈이 너무나 쌓여 떠나지 못하고 사흘 동안 발이 묶였던 조 대인과 포대기에 싸인 삼대독자를 껴안은 일지가 사인교를 타고 절을 떠났다. 주지와 비구니들의 환송을 받았다. 눈길을 헤쳐 가느라 닷새 만에 집에 다다른 조 대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안방마님이 글을 남기고 집을 나간 것이다. 글의 요지인즉슨 삼대독자의 친모인 일지를 안방에 앉히고 자신은 찾지 말라는 것이다.

조 대인은 사랑방에 앉아 약주를 마시며 이 생각 저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뼈대 있는 집안에서 시집온 류씨는 5년이 지나도 아이를 못 낳았고 결국 씨받이 여인을 찾았다. 이대독자 조 대인의 대가 끊길 판이라 안방마님 류씨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일찍이 어미를 여의고 홀아버지를 모시며 살던 열여섯살 일지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홀아버지가 극심한 조갈병으로 몸져누운 것이다. 외상이 쌓이고 쌓여 의원이 발을 끊자 외동딸 일지는 소문을 듣고 조 대인 집에 찾아가 안방마님을 만났다. 일지는 안방마님 류씨로부터 큰돈을 받아 의원의 외상을 갚고 고모를 불러와 병석의 아버지 치료를 맡겼다. 자신은 조 대인과 합방을 시작했다. 석달 만에 헛구역질을 하자 제집으로 돌아갔지만 결국 아버지는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일지는 해산할 날을 두달 남겨두고 다시 조 대인 집으로 들어갔다. 달덩이 같은 삼대독자 아들을 낳았을 때 조 대인보다 더 기뻐한 사람은 안방마님 류씨였다. 씨받이가 아들을 낳고 나면 이튿날 쫓겨나는 게 예사인데, 덕스러운 류씨는 일지를 동생처럼 아꼈다. 별당에 붙잡아두고 젖 잘 나오라고 곰국을 계속 달여 먹였다. 삼대독자는 일지 품에서 젖을 빨 때를 빼고는 조 대인과 류씨 품에 안겨 살았다. 서너달이 흐른 어느 날, 일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을 풀어 사방팔방 찾았지만 허사였다. 삼대독자 아기는 제 어미를 잃고 눈만 뜨면 울어댔다.

일년여가 지난 어느 날, 고깔을 푹 눌러쓴 탁발 여승이 조 대인댁에 들러 하녀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다가 떠났다. 안방마님 류씨가 집사를 불러 미행하도록 했다. 백이십리나 떨어진 절을 집사가 알아내자 류씨가 잠옷만 걸치고 그 절로 찾아가 주지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던 것이다. 주지스님도 사미계를 내렸지만 속세의 연을 끊지 못하고 눈물을 달고 사는 그 사미니를 유심히 보고 있던 참이었다. 류씨가 집으로 돌아와 조 대인의 등을 떠밀어 사인교에 태워 눈 오는 날 그 절로 보냈다.

이번엔 안방마님 류씨가 집을 나갔으니 조 대인은 또 한숨뿐이다. 일지가 백방으로 쏘다니며 찾아 나섰다. 또 다른 절에서 류씨를 모셔와 안방에 앉혔다. 뭇사람들도, 류씨도 일지에게 류씨를 형님이라 부르라 했지만 일지는 한사코 마님이라 불렀다.

일지는 아들 하나를 또 뽑았다. 집안에 웃음꽃이 끊일 날이 없었다. 친구들이 조 대인에게 여승 둘을 데리고 산다고 놀렸지만 조 대인은 껄껄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