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생각 : 청라언덕 위 첫사랑 이야기
동무생각 : 청라언덕 위 첫사랑 이야기
오늘은 옛 선대들의 숭고하고 아름다웠던 첫사랑이야기 하나를 해보고자 한다.
푸른 청(靑 ), 담쟁이 라(蘿) 자를 써서 “푸른 담쟁이덩굴” 이라는 “청라(靑蘿)언덕”은 당시 대구 출신 박태준(朴泰俊:1900-1986)이 다니던 대구 계성학교(기독교계 학교)의 아담스 관과 맥더스관 그리고 언덕(동산)에 위치한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들이 푸른 담쟁이덩굴(청라)로 휘감겨 있는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당시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는 초가집 내지 기와집이었는데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서양의 고풍이 담긴 붉은 벽돌집을 짓고 담장이 넝쿨을 외벽에 휘감도록 길러 여름에는 더위를 줄이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의 풍경을 즐기는 서양문화에서 비롯된다.
청라언덕은 대구 계성성당 길 건너편 60개 돌계단 길을 거쳐 올라가는 운치 있는 곳에 위치한다.
여기서 박태준은 포항제철을 건설한 그 유명한 박태준 포항제철회장이 아니고 연세대학교 초대 음악대학 학장을 지낸 박태준 교수이자 작곡가를 일컫는다.
박태준이 작곡한 가곡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대구 동산동의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치료로 유명한 대구의 계명대병원이 바로 이곳 동산의료원이다.
박태준은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로서 1920년 동요 “기러기(기럭기럭 기러기~)”
1925년 24세 나이로 “오빠생각(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등 우리나라 최초 동요를 작곡했고 1922년 그가 작곡한 우리나라 첫 가곡인 “동무생각(思友)”의 노랫말이 바로 이 청라언덕 위의 돌비(石碑)에 새겨져 있다.
박태준은 동산동(언덕이 있다하여 붙여진 동네이름) 개신교집안에서 태어나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마친 뒤 마산 창신학교에 영어겸 음악교사(1921-1923근무)로 시인 이은상(李殷相:1903-1982) 국어교사와 함께 근무하게 된다.
마산 창신학교 설립자의 아들이자, 창신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노산 이은상은 1년전 이 학교로 부임한 태준이 지은 동요를 좋아했다.,
박태준은 이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월포의 일몰을 좋아했고 노마산에서 구마산으로 가는 다리위에서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이야기 하며 한 시절을 보냈다.
이은상은 원래 마산 사람으로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박태준의 대구 고향,
푸른 담쟁이덩굴이 가득한 청라언덕과 좁고 긴 계단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고향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박태준 선생의 이야기가 언제나 고운 시처럼 들렸다.
그 날도 박태준과 이은상이 함께 노비산 언덕에 앉아 암울한 조국의 현실(일본 강점기)에 마음이 어둡고 우울할 때, 한번은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하여 이은상이 자신보다 3년 위 선배인 박태준에게 짓궂은 표정으로
“박 선생님의 첫 사랑은 어떤 분이셨나요?” 하고 질문했다. 노산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첫사랑은 뭐, 한번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는걸요.“
“첫사랑이 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속에 박제되는 사랑이고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 속에 박제되는 그런 사랑이 아니던가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태준이 첫 사랑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다니던 계성학교 가까이에 있는 신명여고(경북여고 전신)의 한 여학생이 있었어요.
함께 제일교회에 다녔는데 한번은 그 여학생이 교회 합창연습 단원들에게 자두 한 바구니를 가져와 나눠 주었어요.
전 그 자두가 저한테까지 올까하며 가슴을 조이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결국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어요. 혹시 자두를 못 받게 된다면 내가 자리에 없었으니 주지 못했을 거라 위안 하려고요.
그 후 돌아오니 오르간 위에 자두 두 알이 놓여 있었어요. 깨끗한 손수건이 자두 위에 덮여 있었지요. 그 자두를 한참 책상 위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았어요. 더는 둘 수 없을 만큼 썩고 말라버렸을 때 꼭지를 따서 그 꼭지를 습자지에 싸서 보관했지요.
교회로 가려면 청라언덕을 지나가야 했어요. 여학생은 저녁 예배를 드리러 그 길을 지나곤 했는데 전 오르간 연습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언덕으로 가 그 여학생이 지나는 걸 바라보았어요. 손수건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는 다가올 그 시간을 아껴두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를 기다렸어요. '자두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지요. 라일락 이파리가 잔뜩 두꺼워진 칠월 하순이었는데, 그즈음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는. 하지만 라일락 이파리가 어떤 맛인지는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득 저는 그 맛이 궁금해졌어요. 사랑의 맛이 궁금해졌던 거지요. 손을 뻗어 연한 잎 하나를 떼서 입안에 넣었는데. 아, 그 맛이란! 그건 먹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어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뱉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 기다림이 허사가 되고 말 것 같았거든요.
그때였어요.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어요. 기다림은 그렇게 길었는데 그녀의 걸음은 어찌나 빨랐던지 내가 이파리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그녀는 내 코앞에 마주 있었지요. 아직도 입안에는 혀가 얼얼하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가슴은 두근두근 했지요.
그 때 내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바보 같게도 “라일락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골백번 연습한 말을 두고 라일락이 고맙다니요!
순진한 아이처럼 귓불이 붉어진 태준을 바라보며 노산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아이고, 도대체 그 이파리 맛이 어땠게요?” 묻자,
박태준이 “그건 이 선생님이 직접 맛보셔야 해요. 사랑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테니까요.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절 보고 웃었어요. 제게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답니다.
그 후 그녀는 말 한 마디 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렸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산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끼적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 선생님 곡에다가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으세요, 그러면 그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 속에서나마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가사를 써드릴 테니 곡을 붙여보시겠어요?”
잠시 후 노산은 태준의 고향 추억과 눈 앞에 펼쳐진 월포 바닷가의 풍경을 담은 시를 건네주었다. 수첩을 받아든 태준의 눈동자가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이군요.”
그 때 이은상 선생이 쓴 즉석 시(詩)가 가곡 “동무생각”의 가사가 되었다.
1922년 작곡 당시 제목은 “사우(思友)”였으나 나중에 풀어쓰게 되면서 “동무생각”으로 바뀌었다. 이 가곡은 초, 중학교 음악교재에도 실려 우리들이 일찍이 접하였던 바 있다.
< 동무생각>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
1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2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3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박태준이 그렇게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첫 사랑 여인, 그 여학생은 백옥 같은 흰 피부를 지닌 절세미인 한 송이 백합화(백합화는 신명여고 교화(敎花)였음)를 보는 것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훌쩍 어느 날 일본 유학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 유학 중 그녀는 폐결핵에 걸려 돌아와 24세 나이로 그 아름답던 생을 마감했다한다.
일설에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법조인과 결혼하였으나 경주-대구 간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느 설이 정확한 사실인지 확인된 바 없다한다.
이렇게 박태준은 불현 듯 떠나간 첫사랑 그 여학생과는 손 한번 잡어보지 못한 완전한
짝사랑 이었을 뿐인데도 그가 죽는 날까지 그 여학생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가곡의 가사내용에도 숨어있듯 창포물을 들인 듯 윤기 나던 소녀의 검은 눈썹과 그 눈썹 아래 싱그러운 소녀의 미소가 박태준의 뺨을 조용히 만지고 자나곤 했다.
멀리 파도 속으로 백합 같은 소녀의 희디 힌 얼굴과 저녁 조수처럼 떠난 흰 새 같은 박태준의 얼굴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했다.
그가 사랑했던 여학생이 다니던 신명여고의 교화(敎花)가 백합화이었기 때문에 가사 중 백합화는 바로 그 여학생을 두고 한 표현이다.
박태준은 민족정서를 표현해 낸 우리 현대음악 개척의 선구자이다 그의 첫 사랑은 “동무생각”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다.
박태준은 마산 창신학교 교사직을 마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합창지위를 전공하여 석사학위 취득하고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그 후 이런 인연으로 박태준은 이은상의 소개로 이은상의 고종사촌 여동생인 김봉렬과 결혼하면서 서로 인척 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를 설립하였고, 음대 초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박태준의 작은 첫사랑이야기가 가곡으로 작사, 작곡되어 온국민의 애창곡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불려지고 있다.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지는 이면에는 모두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와 이별의 슬픈 이야기와 삶의 고달픈 사연들이 역여져 있다.
그래서 그 노래의 숨어있는 사연들을 알고서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 더운 감동을 받는다.
오늘도 그런 이유로 한 편의 아름다운 노래 사연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