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와 요석공주 ㅡ2
-원효대사와 요석공주2-
1편에 이어집니다 요석 궁으로 보내진 원효의 젖은 옷을 갈아입힌 요석공주는 단 3일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원효와 요석은 삼일 낮밤을 함께 했다. 삼일이 지나고 . 원효는 요석에게 얘기를 하고 떠나려고 하니. 요석공주. 원효대사 가슴을 만지면서. 어딜 가시든지.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고. 넓은 이 가슴속에 티끌보다도 작은, 먼지보다도 적은 나를. 어느 한구석 기댈 되는 없는지요. 했다 원효. 있다도 없고 없다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느냐? 요석은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후 단 3일간의 사랑으로 원효가 떠나가고. 요석공주는 . 배가 불러. 설총을 낳은 것은 655년에서 660년. 사이이다 후일 신라 십현의 한사람이며 우리 옛 문장 이두를 완성시킨 설총이라는 원효의 아들을 낳아. 원효를 바라보듯. 훌륭하게 키우며 먼발치에서. 몸을 숨기며. 소식을 듣고 보곤 했는데. 죽을 때까지 정식으로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원효는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하면서 이름 모를 작은 절로 가서. 승복을 벗고 불목한이 되어 다시 행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수행을 했고. 경기도 소요산 자해암에서 수행중 깨친 것이. 한 생각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만법이 멸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우치며 . 화엄경을 달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고.번역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긴다. <김종국 박사 글> 말년에 경주 분황사(황룡사지 9층탑 발굴 장소옆에 있는데 분황사는 국보인 모전석탑이 있음 견학해 보시라)에 머물며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원효가 남긴 저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모두 100여종 240여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가운데 일부만 전해 지고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소승의 고향은 삼성현의 도시 경산시 용성면이며 용산龍山밑 들판 한가운데 집이다 집에서 서쪽으로 10리가면 원효가 태어난 밤나무밭에 현재 제석사 절이있고 제석사 절에서 10리 더 가면 원효의 생가터에 초개사(삼성산에 있는 절)라는 절이 있다 소승의 고항집에서 동쪽으로10리가면 설총이 자란 장소며 요석공주가 원효대사를 기다린 반용사라는 천년고찰이 있다 태종무열왕은 서라벌에서 요석공주가 보고 싶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왕재길을 따라 반용사로 갔다 시간내시어 초개사, 제석사, 반용사, 원효생가와 더불어 운문땜도 구경하시라 초봄에는 반용사 둘러보고 내려가면서 육동의 향기진한 미나리도 맛보시라 다음회에 삼성현과 역사의 흔적이 깃던 사찰에 대하여 올립니다 일향전념一向專念 일심불란一心不亂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 극락정토 아미타불~ -묘봉사 현각대일 합장- |
'綜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0) | 2024.11.25 |
---|---|
2024년 파리 올림픽 (0) | 2024.11.24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ㅡ1 (0) | 2024.11.18 |
jahun30 tistory (0) | 2024.11.16 |
봄의 예찬(禮讚) /안병욱 (6) | 2024.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