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99)낮잠

jahun 2022. 1. 13. 18:53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99)낮잠

오 진사 아들과 혼례 올린 달심이 몇달 만에 친정으로 돌아오는데
 
헐헐스님이 황포돛대 목선을 타고 저녁나절에야 땅을 밟고 나루터 주막에 들어갔다.
스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주모의 외동딸 달심이가 반갑게 인사하며 바랑망태를 받아들었다. 헐헐스님은 달심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3년 전 낭패당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때 달심이는 열여섯살. 주모가 주막을 나서는 스님의 가사 장삼을 잡고 달심이 사주팔자를 봐달라고 하도 졸라대 주역을 펼쳐놓고 육갑을 짚었다.
이번 혼사를 파하게.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시집을 세번 가게 될 걸세.
주모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하나뿐인 피붙이가 달심이다. 제발 자신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었는데 시집을 세번 가다니! 달심이와 약혼한 오 진사네 셋째 아들, 그러니까 주모의 사위가 될 그 사람이 주모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달심이는 눈에 콩깍지가 씌어 그 남자하고 혼인을 못하면 목을 매 죽겠다고 했다. 이 와중에 헐헐스님의 사주팔자가 그렇게 나오니 주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헐헐스님이 쩝쩝 입맛을 다시며 주막을 나서자 북풍 찬바람에 귀가 떨어져나갈 것만 같은데 찬물 한바가지가 퍼부어졌다. 달심이가 도끼눈을 치뜨고 이를 옥다문 채 그 짓을 한 것이다. 머리에 목덜미에 덮어 쓴 찬물은 금방 얼어붙어 암자까지 가는 길에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다.
헐헐스님은 배를 타는 일이 드물고 어지간하면 포구에 발길이 닿아도 주막에 들르는 일 없이 바로 암자로 갔다. 그런데 그날은 날도 저물고 배도 고파 3년 만에 할 수 없이 주막에 다시 들렀더니 달심이가 반갑게 맞은 것이다.
3년 전 오 진사의 셋째 아들과 혼례를 올린 달심이는 여섯달도 못 채우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천하의 오입쟁이 신랑은 혼례 올린 지 서너달은 한눈 안 팔고 달심이만 껴안더니 그 이후 본바탕을 드러냈다. 강 건넛마을 청상과부 수절을 깨뜨리더니 기생집 동기 머리를 얹어주고 첩살림을 차렸다. 달심이는 시댁에 침을 뱉고 친정으로 와버렸다.
주모는 딸년의 등줄기를 손바닥으로 후려치다가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했다. 한달이 지나도 1 년이 지나도 신랑이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러자 달심이도 모든 걸 잊어버리고 제 어미 몰래 객방에 드나들었다. 끓어오르는 열기도 식히고 수월찮은 수입도 챙긴 것이다. 주모도 오 진사의 셋째 아들을 더는 기다리지 않았지만 이제 열아홉밖에 안된 딸년을 이렇게 살아가게 할 순 없었다. 3년 만에 나타난 헐헐스님에게 매달렸다.
다시 육갑을 짚어본 헐헐스님이 긴 한숨을 토했다.
세번 시집가는 건 변함이 없네. 세명 모두 오수에 매몰되겠네.
주모가 물었다.
스님, 오수가 무엇입니까요?
오수(午睡), 낮잠이야.
주모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친정 주막에 처박힌 지 세해가 지나도 아직 열아홉, 달심이는 인물도 좋고 색기까지 넘쳐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다. 서당훈장님, 보릿고개 걱정 없는 농사꾼, 새우젓 도매상. 하나같이 착실하지만 모두가 늙은이들이라 달심이에겐 어림도 없었다.
친정살이가 길어져도 달심이는 불편한 게 없었다. 가끔씩 제 어미로부터 손바닥으로 등줄기를 맞아도 멍들 일이 아니고, 눈치 봐야 할 올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살짝살짝 객방을 드나들며 도랑치고 가재 잡고!
주막집 구석진 뒷골방은 노름방이다. 주모가 일찍 자면 노름방 치다꺼리는 달심이 몫이다. 골패판 열기는 달아올라 달심이는 너비아니를 구워 올리고 묵을 올리고 술을 올렸다. 어떤 때는 상품을 담보 잡고 이할 선이자를 떼고 돈을 빌려줬다. 젊은 인삼장수가 노름방에서 나와 툇마루에서 연초를 태우더니 달심이를 제 방으로 데려갔다. 땀을 흘리고 나온 달심이가 부엌에서 주머니를 열어보고 기절할 뻔했다. 엄청난 돈이었다. 달심이는 그와 가시버시가 됐다.
노름 끗발은 항상 붙어 다니는 게 아니다. 1년 만에 감춰뒀던 돈도 노름 밑천으로 다 들어가자 달심이는 그 집을 나와 친정으로 돌아왔다. 몇해가 지나 중매로 젊은 선비와 혼인했다. 그 귀태 나는 선비는 낮에 온종일 낮잠만 잤다. 그리고 밤이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출귀몰한 도둑으로 결국엔 옥에 갇혔다. 첫 남편은 오입쟁이, 둘째는 노름꾼, 셋째는 도둑. 셋 모두 낮잠에 매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