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96)아버지
침모의 아들 도읍이 장원급제 후 저녁나절 오 진사 댁을 찾는데…
장모 병문안을 갔던 오 진사가 부인을 처가에 남겨두고 혼자서 집으로 오다 비를 맞았다. 대문을 두드리자 고된 일로 머슴들은 곯아떨어졌는지 초당에 있는 침모가 나와서 문을 열었다.
“여보게, 내 옷이 흠뻑 젖었네. 갈아입을 옷 좀 갖고 오게.”
침모가 부리나케 오 진사의 바지저고리를 가지고 와 사랑방 앞에 놓고 “나으리, 문밖에 새 옷을 놓아뒀습니다” 하고 돌아서려는데 오 진사가 불러세웠다.
“여보게, 젖은 옷이 달라붙어 팔이 빠지지 않네.”
침모가 조심스럽게 사랑방으로 들어가자 오 진사는 촛불을 꺼버리고 침모를 끌어안았다. 밖에는 가을비가 끝없이 내리는데 사랑방에는 오 진사의 가쁜 숨소리만 가득했다. 오 진사가 긴 숨을 토하고 방바닥에 여덟팔자로 드러눕자 주섬주섬 제 옷을 챙긴 침모가 사랑방을 나가 초당으로 돌아갔다. 서른한살 침모는 열일곱살 때 중농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이날 이때껏 아이가 없어 애만 태우다 무자식 팔자소관으로 돌렸다. 남편은 법 없이도 살아갈, 세상 둘도 없이 착한 데다 보릿고개 걱정 없이 곳간은 차 있어 등 따뜻하고 배부른데 단 하나, 자식 없는 게 한이 됐다. 침모는 친정으로 가고 남편이 한달간 함께 살도록 씨받이를 마련해줬다. 감감무소식에 다른 씨받이를 붙여줘도 역시나 허사라 침모가 석녀가 아니고 남편이 씨 없는 수박이라는 게 밝혀졌다. 원체 바느질 솜씨가 좋아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여기저기 대갓집에서 겨울 한철 그녀를 침모로 데려갔다.
올해는 오 진사 댁에 침모로 들어와 불과 보름도 안돼 오 진사로부터 겁탈을 당한 것이다. 석달이 지나 세밑이 다가오자 헛구역질을 하더니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착한 농사꾼 남편 전 서방은 마누라가 남의 씨를 받았다는 걸 알았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마누라 배를 쓰다듬으며 싱글벙글했다. 이듬해 초가을에 옥동자를 낳았다. 남편 전 서방은 그 바쁜 농사철에도 틈만 나면 산모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하늘로 추어올렸다. 하루는 대처에 나가 작명소에 들러 ‘전도읍’이란 이름을 지어왔다. 침모는 착잡했다.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 씨를 받아 뱃속에서 열달을 키워 제 새끼를 낳았다는 감격은 작아지고 아비 아닌 아비가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노라니 괴롭기만 했다.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서당에 오 진사가 찾아왔다. 훈장님과 오 진사는 서로 아는 사이지만 새삼 훈장님은 깜짝 놀랐다. 학동인 전도읍과 오 진사의 눈 매무새랑 긴 인중 등이 너무나 닮았던 것이다. 오 진사도 도읍을 자세히 보고 놀랐다. 학동들을 자습시켜놓고 두사람은 건넛방으로 가 술잔을 주고받았다. 훈장님이 말했다. “도읍은 신동입니다. 이제는 제가 가르칠 게 없어요.” 겸손의 말이 아니었다. “저의 스승인 붕흔 선생에게 더 배워야 하는데 삼십리나 떨어져 있고….”
이튿날 훈장님과 오 진사와 도읍이 붕흔 선생을 만나고 왔다. 며칠 후 오 진사가 보낸 하인이 말잡이가 돼 도읍이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붕흔 선생을 찾아갔다. 그 집에서 기숙하며 글공부를 하다 한 장날 터울로 당나귀가 도읍을 데려오면 오 진사 댁에선 백숙으로 보신하도록 했다. 그러곤 오 진사와 사랑방에서 하룻밤 자고 제 집에는 잠깐 들렸다가 다시 당나귀를 타고 붕흔 선생 댁으로 갔다.
오 진사 자신은 여덟번이나 과거 시험을 봤고 아들 셋도 몇번 보다가 포기했다. 도읍은 열다섯살 때 장원급제를 했다. 오 진사는 소식을 듣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오 진사 댁 넓은 안마당에 가림막이 쳐지고 뒤뜰에는 소 한마리 돼지 일곱마리를 잡은 고기로 따당 따당 칼질하는 소리가 요란하고 가마솥은 펄펄 끓었다. 백마를 타고 어사화 꽂은 복두를 쓴 도읍이 고개를 넘어 동네로 들어서자 고을사람들로 길이 막혔다. 도읍을 태운 백마는 오 진사 댁으로 가지 않고 침모 집에 갔다. 말에서 내린 도읍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임금님이 하사한 감로주를 따라 아버지(?) 전 서방에게 올리고 복두를 벗어 아버지 머리에 씌운 뒤 큰절을 올렸다. 전 서방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어머니 침모는 전 서방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쏟았다.
저녁나절 복두를 집에 벗어놓고 도읍은 오 진사 댁으로 갔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화가 치밀어 오른 오 진사는 사랑방에서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도읍이 사랑방으로 들어가 큰절을 올리며 “오 진사 어른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자 오 진사가 “내가 아비야, 너의 아비!”라며 집이 떠나갈 듯이 고함을 쳤다. “진사 어른, 고정하십시오.” 도읍은 끝내 아버지 소리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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