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71)초립동
단봇짐에 죽통을 멘 초립동, 주막집 안방서 깊은 잠에 드는데…
단봇짐에 죽통(竹筒)을 멘, 열네댓살 먹은 초립동(草笠童)이 쉼 없이 길을 걸었다. 어느 날 날이 저물어 나루터 주막집에 들어갔다. 주모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팔을 걷어붙이고는 부엌에 산더미처럼 쌓인 빈 그릇을 들고 우물가로 가서 짚수세미에 재를 묻혀 깨끗하게 닦았다. 아궁이의 재도 꺼내서 통시 옆 거름더미에 버리며 부엌을 시원하게 치워주자 주모가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머스마가 기지배처럼 부엌살림을 어찌 이리 잘하노.”
주모는 초립동 등을 두드리고 국밥을 한그릇 말아줬다. 초립동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주모가 “객방에 손님이 셋뿐이다. 거기 가서 자거라. 방값 받지 않을 테니”라고 했다. 그러나 초립동은 고개를 저으며 부엌에서 자겠다며 아궁이 앞에 가마니때기를 깔았다.
“야 이놈아 방에 빈자리가 수두룩한데 웬 청승이냐, 객방에서 자기 싫으면 안방에 들어오너라.”
초립동이 생긋이 웃으며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이고 안방에 들어가 윗목에 자리 잡았다. 아랫목에 누운 주모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 죽통에는 뭐가 들었길래 밥 먹을 때도 메고 잠잘 때는 색시 끼고 자듯이 꼭 껴안고 있냐?”
초립동은 대답이 없다. 도르릉 도르릉 벌써 깊은 잠에 들었다. 잠 못 들어 하던 주모가 장롱 속에서 목신(木腎)을 꺼내다 말고 살며시 깊게 잠든 초립동 옆에 누웠다. 숨을 고르고 난 주모가 초립동의 허리끈을 풀고 사타구니에 손을 넣다가 “엄마야!” 하곤,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 고추가 없었다.
남장소녀(男裝少女) 초립동이 며칠 후 한양 북촌에 나타났다. 북촌 아랫자락 도화서(圖畵署) 인근에 즐비한 필방이다. 화방들을 두리번거리던 초립동이 한참을 망설이다 골목 안에 처박혀 있는 조그만 서화방에 들어갔다. 주인 영감님이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초립동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리 집 가보(家寶)를 팔려고요.”
죽통을 내려 뚜껑을 열고 족자를 꺼냈다. 서화방 주인 영감님이 족자를 풀자 조맹부의 송설도가 펼쳐졌다. 고산준령이 병풍 치고 눈을 인 노송이 우뚝 선 그림 옆에 날아갈 듯 초서체 시구가 춤을 추고 있었다. “아~ 눈발이 이 서화방에 몰아치는 것 같구나.” 영감님이 감탄했다.
“어디서 왔느냐?”
“경상도 땅 의성에서 왔습니다.”
“며칠이 걸렸느냐?”
“열여섯새가 걸렸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그 먼 길을 오느라 남장을 했구나.”
한눈에 알아보는 주인 영감님 한마디에 초립동은 깜짝 놀랐다. 바깥에 어둠 살이 내려앉자 영감님이 오갈 데 없는 초립동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반주 한잔을 마신 영감님이 초립동에게 가보를 팔려고 그 먼 길을 걸어 온 연유를 물었다.
초립동 집은 부자였다. 천석은 못했어도 오백석은 너끈했다. 어느 날, 고을 사또가 초립동 아버지를 관아로 부르더니 조맹부 서화 한점을 안기며 “당숙께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 족자를 사왔지 뭔가. 본관이야 뭐 이런 데 관심이 없으니 이 진사네 사랑방에 잘 어울릴 것 같소”하며 건넸다.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방법치고는 고단수였다. 이 진사는 천냥을 주고 조맹부의 서화 족자를 가지고 와 둘둘 말아 다락에 처박아뒀다. 파락호 이 진사는 주색잡기에 가산을 탕진하고 마지막 칠년은 조갈병으로 드러누워 몇뙈기 남은 논밭을 약값으로 다 털었다.
초립동이 다락을 뒤지다가 서화족자를 발견하고 의성읍내 필방에 들고 갔더니 필방 처사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초립동은 서화족자를 통에 고이 넣어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가져온 것이다. 북촌 서죽화방 주인이 반주 석잔을 비우며 초립동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말 한마디 없이 한숨만 푹푹 쉬다 입을 열었다.
“이 족자 뒤에 사또가 보증날인을 했구나. 그 사람은 지금 예문관 부제학으로 있는 신오출이다.”
초립동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데 “조맹부의 서화가 진품이라면 천냥이 아니라 수십만냥 할 거야.” 초립동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튿날, 예문관에 초립동이 나타나 부제학을 만났다. 부제학 신오출이 누가 면회를 왔다기에 나가보니 웬 당돌한 초립동이었다.
“사헌부에 발고를 하러 가기 전에 먼저 나으리를 만나보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여기 왔습니다.”
초립동이 족자를 펼쳤다.
“너희 아버지 이 진사가 이 족자값으로 내게 얼마를 건넸다 하더냐?” “일만냥!”
“뭐라고?! 오백냥 아니면 천냥쯤 받았는데 일만냥이라니! 나를 등치러 왔구나!”
부제학이 펄펄 뛰었지만 초립동의 “사헌부에서 따집시다”라는 싸늘한 한마디에 풀이 죽었다. 결국 칠천냥을 받아든 초립동이 예문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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