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많은 우리 근현대사속에서 명멸해간 인물들을 재해석하고, 다시 복원해보는 시간인데요, 오늘은 시사소니 이성순의 삶을 조명해 봅니다.
서해성의 인물한국사 - 시라소니[1914년~1983년]
◎ 사회/김어준>
왜 시라소니인가.
◑ 서해성>
인물한국사는 단지 정치인이나 혁명가, 또는 문화적 업적이 커다랗다거나 하는 사람만을 다루고자 하지는 않는다. 오늘 이성순의 경우처럼 실은 허락이 된다면 더욱 다양한 사람들을 다루었으면 한다. 문제는 자료에 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떠도는 자료들에 대한 신뢰도가 낮기 때문에 풍문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여기서 옮기기는 퍽도 어렵다. 특히 저자를 떠돌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공식화된 기록이 있을 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투옥기록 정도가 고작이다. 흔히 시라소니(스라소니)라 부르는 이성순의 삶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그러므로 떠도는 이야기들은 대개 과장되고 부풀려질 수밖에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증언은 대개 본인이나 동료, 가족들-이들이 싸움에서 졌다고 말하기를 즐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들이다. 설화의 특성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입으로 참여해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듣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무엇보다 조건을 갖춘 이야기라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없는 주먹 이야기를 누가 듣고 앉아 있겠는가. 거기에는 늘 대리성! 취를 갈망하는 '한 방에 보내버린 전설'에 대한-하물며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더라도 충족되기를 간절히 바라는-기대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 사회/김어준>
도대체 주먹, 혹은 건달, 깡패, 협객이란 무엇인가.
◑ 서해성>
이성순의 삶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몇 가지를 미리 짚어둘 필요가 있다. 오늘 이성순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그가 주먹 세계에 들어섰고 또 오늘날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되었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물론 이성순의 삶도 결코 조선 백성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제 이 방송을 통해 그저 '어깨들의 멋진 모습'이 아니라 그 '멋'의 진실에 되도록 접근해보고자 노력할 것이다. 우선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본 것이 결코 진실일 수만은 없다는 점을 먼저 말해두어야 할 듯하다. 그것은 허구이되 역사(현대사)적 상황 위에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상당히 위험한 허구가 될 수 있으며, 폭력에 대한 경박한 향수와 환상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교육적 측면은 더욱 그러하다-에서 다분히 무모하기까지 하다고 볼 수 있다. 방송이나 영화의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폭력신화가 끼칠 영향은 측정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에서 미디어의 폭력미학이나 폭력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폭력을 기초로 살아온 사람들이 늘 입초리에 달고 사는 말이 협객이다.
그 협(俠)의 역사는 길다. 이들은 고래로 왈짜(자), 왈패, 무뢰배, 불량배, 폭력배, 건달, 어깨, 주먹, 주먹신사, 깡패, 협객, 깍쟁이, 양아치, 폭력배, 조폭, 불한당 따위로 불린다. 이들이 가장 불리기 원했던 것은 협객이었다. 협이란 본래 중국말이다. 협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중들이었거나 민중출신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저자의 싸움 길에 나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늘 돈푼을 쥐어주거나 살인이나 폭력을 교사, 사주하거나 밥을 먹이고 부리는 자들이 있었다. 또 이들은 스스로 이른바 '나와바리(영역)'를 만들어서 일대의 상권이나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삥'을 뜯는 일로 '정치'를 하고 다녔다. 도박판에서 돈을 대고-이를 '대라'라고 한다-개평이란 '세금'을 뜯어내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늘 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정치 권력의 최정점과 직접 소통하는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직후 이들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치안이 안정적이지 않은 점도 있었지만 분단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국가나 ! 정당 폭력보다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이들을 활용해서 노동조합 분쇄, 정 적을 제거하거나 사상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제거하곤 했던 것이다. 이들의 손에 뭉개진 사람숫자는 통계가 나와 있지 않아서 그렇지 상당수에 이른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독특한 캐릭터로 독자성을 가지고 대중의 지지 위에 서 있었다기보다 상권과 권력에 기생했다고 하는 게 옳다. 따라서 이들의 '멋'은 이들이 한 행위가 지니는 사회성이나 역사성을 완전히 걷어내 버린 실은 전도된 가치이자 쾌감일 뿐이다. 이들이 '잇폰/잇뽕'(一本: 일본말로 한 방이라는 뜻)에 덩치 큰 사람을 날려버리고 당당하고도 유유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믿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국가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말고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이들이 보인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여유' 뒤에는 정치권력의 하수인이었던 친일경찰의 묵인과 방조, 이를 넘어선 비호가 있었던 것이다. 경찰과 이들은 권력의 하부이자 동시에 먹이사슬의 일부였다.
해방 직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전업으로 해서 몰려들었던 것은 불행히도 생계 때문이었다. 주먹을 쓰고 목숨을 걸고라도 입에 풀칠을 해야 했던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였다는 뜻이다. 정당성 없는 권력의 하부를 구성한 이들에게는 한시적으로 치안권에 버금가는 권세와 허세를 누릴 수 있는 엿가락 같은 유혹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권력을 쥐어야 하거나 쥔 자들은 이들에게 이념을 들씌워주었다. 그 이데올로기의 이름이 반공이었다. 알다시피 이들은 선거는 물론 갖은 테러 등 정치적 지지기반이 허약했던 독재권력의 유지시켜내기 위한 현장에 숱하게 동원되었다. 권력은 필요하면 이들을 징발했고 그 역할이 끝났을 때는 곧 용도 폐기하곤 했다. 순수한 협객이란 당초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하기도 어려웠다. 놀고 주먹만 쓰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밥을 먹이는 자가 있다면 당장은 아니라도 머지 않아 이를 활용할 생각을 지닌 후원이었을 게 너무도 뻔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들이 '애국적'이거나 '민족적'이기는 실로 어려웠다. 아니, 이들에게 정의와 불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이들이 가지고 있는 주특기, 곧 폭력은 당초부터 정의롭? 穗?퍽 어려운 것이었으며, 이들 스스로에게 그러한 인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 극단적 결과물이 송진우 여운형 김구로 이어지는 암살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에게는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그 뜻은 실상 하나? 箚?보면 된다. 다만 깡패라는 말은 영어의 갱(gang)과 우리말 패의 합성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들 개인이나 집단의 특성은, 우선 힘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노동에 있으며, 세 번째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대해서 크게 이의를 달 사람은 없어 보인다. 세 번째로 말한 의리란 대체 무엇인가. 기대와는 달리 이들이 결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의리보다는 이익에 더 매달려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무뢰배들의 전통은 일제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이미 조선시대에도 왈짜나 무뢰배들의 활동은 기생방에서는 물론 과장-과거 시험 보는 곳-에서까지 '눈부셨다'. 검계(劍契) 살주계 살략계 홍동계 활자 협사가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포교, 의금부 나장, 승정원 사령, 대전별감, 무예별감도 있었으며, 장사치와 한량들까지 두루 섞여 있는 중인이 주류였다. 때때로 이들은 검계나 살주계에서 볼 수 있듯 반사회적 모습을 띠기도 했다.
우리와 가까운 중국의 경우, 협객의 전통은 기록으로 잘 남아 있다. 기왕에 하는 말이지만 우리도 이들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와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제까지 나온 것들은 주로 무용담이거나 활극류가 주된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라기보다 앞서 말한 대로 설화적 객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마천의 붓으로 자객열전 머리에 올라 있는, 진(晉)나라 지백의 식객으로 조양자의 겉옷을 베고-목숨을 끊는 복수는 이루지 못했지만 실패하여 의복을 베는 상징적 행위를 하고 자진함-죽은 전국시대 초기 자객 예양, 자신이 섬기던 엄중자를 위한 복수에 성공한 뒤 얼굴 때문에 증거가 밝혀질까 봐 스스로 눈을 찌른 뒤 얼굴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죽은 섭정, 나중에 시황제가 된 진(秦)나라 왕 영정( 政)을 죽이러 살인기계 진무양과 함께 떠났던 형가탄(嘆)으로 유명한 형가를 비롯하여 협객이나 자객에 관한 기록은 양과 질에서 우리와 비길 수 없으며, 일찍부터 상당히 높은 차원의 전형을 창조해내고 있다.
근래 중국의 사회사를 전공하는 젊은 학자 진보량에 따르면 중국에서 유맹(流氓)을 일컫는 말은 너무도 다양해서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주요한 예만 들어도 1백 가지가 훨씬 넘는다. 유맹은, 유부 유수 유자 유인 유곤 유사 유협 유곤 유비 유탕자 유예 유개 유기를 비롯하여 타민 피민 한민 적민 경민 부맹 뇌자 악소 악소년 여리소년 음악소년 경박소년 경협소년 악자 경협 대협(大俠/臺俠) 흉협 간협 유협 부유무업자 부식자 부말자 불궤지민 망도 오민 무뢰소년 경박소년 호사소년 용감소년 악소년 향당소년 주리소년 교인 부랑인방시악소 망명소년 협소년 시정흉호 무뢰적 난당적 가적 한자 묘객 추리 한한 한인 한비 파락호 투박소년 부랑인 부랑여리자 안민 도자 완도 백일귀 무도 무적 발무도 발피 망도 망일지도 무적지도 가시무자지도 層慣?작피 초피 초비 뇌피 광곤 단래 행란지민 무료지민 무행지민 시포 시호 날호 누두 광곤 지곤 토곤 날곤 비곤 선곤 학곤 금곤 유곤 선곤 금곤 혼혼 매타적 타한적 팽사적 강차적 지곤 백상인 탁초 달피 요탕 남자 니퇴 타류 탑류 틈곤 비자 노창 야선 마류 괘탑 오두 발피 마류자 파각골 등 미쳐 뜻을 다 가늠해? 릴竪?버거울 정도로 각색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행태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를 시기로 크게 구분해보면, 선진 시기의 타민 한민 유협, 진한시기의 악소년 여항소년, 위진남북조시기의 무뢰배(무뢰소년) 경협 수당 시기의 방시악소 시정흉호 한자 묘객, 송대의 파락호 도자 송귀 업취사 십호 염라 호횡 부랑인 몰명사, 원대의 무적지도 호민 아내, 명대의 광곤 날호 일민 파곤 타항 청수 아두 송곤 방항 한한 방한 노백상 진회건아 신곤 호강대활 태감 유맹, 청대의 무뢰곤도 대활 호강 혼혼아(천진) 백상인(상해)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 사회/김어준>
그렇다면 협객은 없었다는 것인가.
◑ 서해성>
협이 '의리'를 갖게 되어서 활동한 예는 우리의 경우 의적이라고 불린 경우들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 일지매 따위가 그것이다. 의적이란 도적은 도적인데 옳은 도적이라는 말 아닌가. 협객도 옳은 일을 하면 의협이라 한다. 여기서 옳은 일이란 힘없는 자를 돕고 가난한 자에게 베푼다는 것이 대전제이다. 적어도 해방 이후 우리사회의 협들 가운데 의협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터이다. 유지광-55년 이정재의 부하로 들어와 동대문 왈짜가 됨. 장충공원 테러, 4.18 고대생 데모대 습격 등 정치테러의 주모자. 4.19 이후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석방. 이후 동부연쇄점 본부 등 운영. 88년 사망(63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살아오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한 적은 없다. 다만 의리와 우정을 말하면서 실상은 그러지 못했던 협객의 길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후배들의 인도에 나섰던 나도 사실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실 현대사에서 민중들이 영웅시-또는 영웅시한 것처럼 조작된-한 협들은 정작은 민중들을 핍박한 자들이다. 협으로서의 세계관이나 가치체계가 실질적으로 전무했다는 점에서 현대사 속의 협의 전통은 계승할 만한 게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말한 의리란 이익을 기초로 한 '나와바리' 의식에 지나지 않았으며, 조직 상층 지배자나 권력자에 대한 주종적 복종일 뿐이었다. 따라서 의리라는 말의 본뜻인 옳은 도리를 좇는 일은 이들에게 없었다. 동료에 대한 애정 따위도 가치체계가 아니라 주관적 주정적 인간관계에 대한 연대감뿐이었다. 하도 의리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되는 바람에 의리라는 말 자체가 끝내는 왜곡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또 회자되는 까닭은 삼류소설과 그에 기초한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낸 신화 생산과 이미지 조작 때문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불행히도 우리사회가 해방 이후 현대사를 통해 창조적 인간전형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도 중요한 원인이 있다. 전두환과 오랜 '의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가운데 장세동이란 이가 있다. 그는 흔히 의리의 사나이로 ? 恬??있다. 전두환과 어떤 관계를 지키는 것이 의리란 말인가. 그에게는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않거나 못하는 의리, 곧 주군에 대한 끝없는 복종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을 존중해야 할 가치가 아니? ?버려야 할 유산이다. 이 전도된 의리와 착각은 이 사회가 아직 비정상적인 데가 많다는 뜻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권력이 타락할수록 이러한 가치들이 판을 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아울러 본디 협이란 민중의 영웅이어야 하는데 내용으로 봐 정작 그러하질 못했다. 다만 (소)영웅에 대한 민중의 갈망만은 그치질 않았다. 그 까닭은 민중이 세상의 변화나 당장의 사회적 분노나 갈증 해소를 요구한 때문이지 이들 왈패들이 옳아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를 탈주범 신창원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신창원의 치안권력에 대한 농락은 국가권력이 얼마나 민중적이지 못했는가를 반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 이후 해방공간과 분단체제의 성립, 그리고 민중으로부터 외면 받던 이승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들이 활용되던 때였다. 그 뒤 이들은 빠른 속도로 소멸해갔다. 이승만이 경찰과 깡패조직을 권력유지수단으로 삼은 반면, 박정희는 국가폭력집단인 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도덕성을 증명해주기에 더 없이 좋은 대상이었다. 이들은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거나 1만 명 가량이 체포되어 국토건설단으로 동원되어 나갔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회악 일소라는 이 슬로건은 전두환도 거의 같은 방식을 답습했다.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감시고발체계와 삼청교육대가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 정권 아래 밀수조직이나 양은이파, 태촌파를 넘어 오늘날 말하는 이른바 조폭은 자본주의 시장에 기생하거나 직접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 더 이상 정치권의 동원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일진회라고 부르는 학교 폭력은 기본적으로 기성사회나 기성폭력의 예비적, 예행 연습적, 재생산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집단 따돌림 왕따를 포함한 학교 폭력이 학교 안에 경찰을 둔다고 해서 해소되는 게 아니라 사회일반의 민주적 가치 정립과 이행, 그에 따른 사회적 보상구조, 인간적 가치의 확립 없이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들 학교폭력을 행하는 자들도 의리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의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의리란 혼자 싸우거나 지 배하기 힘들어서 무리를 지어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데 필요한 폭력집단의 규율일 따름이다. 이는 기성 조폭들과 왈패들도 마찬가지다.
◎ 사회/김어준>
이제 시라소니를 말해보자.
◑ 서해성>
조금 긴 전제를 앞에 한 것은 폭력이라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짚고 또 혹시라도 이들을 어설픈 '낭만적 태도'로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언급한 것이다. 부족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사실에 입각해서 말해보겠다.
시라소니 이성순은 신의주 사람이다. 이성순에 관한 기록은 정확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다. 전체적으로 정황적으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고 한다. 신의주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여러 번 말했지만 신의주는 기독교도들에게 조선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독교가 번성한 곳이었다. 또 새로운 물산과 새 사상의 유입통로이자 국내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는 플랫폼이기도 했다.
15살에 활을 당겨 쏘았다-전통 활은 성인 남자도 일정기간 연습을 거쳐야 온전히 당길 수 있음-는 이성순의 아버지 이기정은 4남4녀-그냥 자식 4이라는 기록도 있음-를 얻었는데 남자 아이 넷을 잃었다고 한다. 이에 답답한 나머지 신의주 제일교회(1911년 설립. 신의주 매기정 8번지)를 찾아가 기독교도 되었다. 둘째 부인에게서는 자식이 없었다. 이기정은 다시 부인을 얻어 5년 터울로 아들 둘(이성덕/이성순)과 딸 하나를 얻었다. 이기정은 농사 천 석을 하는 사람으로 씨름을 잘했다고 한다. 이기정의 가세는 교회와 관련해서 담보 같은 것을 해서 기울게 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내력은 알지 못한다. 이성덕은 스케이트 선수로 와세다대학을 마쳤다고 한다.
나중에 시라소니라 불리게 된 이성순은 1916년 2월 29일 신의주 미륵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이성순은 17살인 32년부터 비단과 인조사를 중국 안동에 가서 판 뒤 은을 가져오는 밀무역에 뛰어들었다. 그는 세관원의 단속을 피해 달리는 히카리(특급)를 중간에 타고 내리는 '도비노리(飛乘)'-기차를 갈아타는 일은 '노리까이(에)'라고 함. 역 근처에서 도비노리를 하는 일을 노리까이라고도 함-를 해야만 했다. 이성순만이 아니라 보퉁이 밀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기차에 붙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사람들을 밀무역꾼들은 시라소니라했다. 이는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이성순의 빠른 동작과 판단은 이러한 생존싸움에서 비롯되고 닦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흔히 사자가 새끼를 밀친다거나 호랑이나 스라소니가 그렇다고 하지만 이는 생물학적 사실과는 다른 ? 뼈甄? 또 호랑이 새끼 중 그렇게 해서 돌아오지 않은 놈을 스라소니라고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낳자마자 벼랑 밑으로 밀어서 혹시라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 맹수류는 아무 것도 없다. 상당기간 동안 어미의 보호가 필요한 게 맹수류다. 도리어 먹잇감이 없거나 사냥으로 종을 보존키조차 어려운 게 맹금류의 운명이다.) 이성순은 언젠가 히카리에서 떨어져? ぐТ鳴?가까스로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시라소니란 이름은 이렇게 붙은 것이었다. 이렇게 이성순(聖順)은 이름과는 다르게 고된 팔자가 시작되었다.
압록강을 건너는 이러한 밀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겨울에는 언 압록과 두만을 오가는 거래도 많았다. 김동환의 장시 "국경의 밤"은 이러한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다. 식민 치하 백성의 삶은 이처럼 고단했던 것이다. 가장 무서운 이들은 세관원이나 일제 이동헌병대였다. 이성순은 그 무렵 세관원들이 데리고 다니는 셰퍼드 추적견을 칼로 죽였다고 한다. 그 뒤 배를 이용한 밀무역에 종사했다. 밀무역꾼들은 감시선을 너구리라고 불렀다. 밀무역꾼들은 감시선이 가까이 다가오면 돌을 던져 접근을 막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감시선에 부딪힌 나룻배가 침몰해서 27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성순이 그 배에 탔다가 내린 뒤였다.
이래저래 일경의 감시로부터 이성순은 자유롭지 못했다.
34년 이성순은 중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 '유랑주먹'으로 세상을 떠돌게 된다. 상해와 진남포 평양 신의주 청도 천진을 오가며 주먹 위력을 보일 기회가 잦았다. 그는 중국인은 물론 일본헌병과도 맞닥뜨리면 싸움을 피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잠시 백두산에서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단지 주먹질만 한 것은 아니었다. 37년 상해에서 이성순은 일본 거류민회 아래 있는 근친회에서 경비원으로 일을 했다. 거기서도 물론 싸움이 있었다. 잠시 신의주로 돌아왔던 그는 어련공판장 중개인과 대결을 벌인 뒤 38년 상해에서 화폐가치가 떨어진 동전을 긁어모아 청도에 구리로 팔려다 외환관리법으로 세관에 걸리고 만다. 이른바 '돈배'사건이었다. 신문이 기사를 '잘 내준' 덕에 동전을 구리로 팔아 1천7백 원의 벌금을 내고도 1천8백 원의 돈이 남았다. 그 해 일본인의 아편을 불태운 일로 중국인 청부 폭력배와 한판 맞짱을 뜨게 된다. 다시 상해에서 미국 러시아인들과 대결을 하고 조계지에서 다양한 서양사람들과 싸움을 하다 북경에 와서 일본인 여성( 지혜꼬)의 기둥서방을 내쫓고 잠시 사람에 빠지지만 이성순은 곧 길을 떠난다. 싸움과 대결과 짧은 연애는 늘상 이성순에게 따라다녔다. 그러한 내용을 상세히 전하면 좋겠지만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는 것도 무리이고, 또 한다 해도 생생하지도 사실에 가깝기도 어렵다고 본다. 그 또한 드라마적 판타지를 부여할 위험도 있다.
이성순은 43년에 왕표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쳐먹고는 신의주에서 몇몇 귀국 유학생들과 함께 민족을 위해 일하겠다 다짐하고 길을 떠난다. 이 가운데는 김선곤(해방 후 김구의 밀사로 북에 갔다가 실종)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신의주에서 봉천을 거쳐 산해관을 지나 북경으로 가고자 했다. 그 중 백지여행증을 가지고 있던 이성순은 산해관에서 체포되었다. 공문서 위조혐의로 경찰의 취조를 받은 뒤 그는 일본 코쿠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북지(화북)의 범법자는 이곳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8개월의 징역형이었다. 건강한 죄수들은 와카마츠 조선소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도 이성순은 일본인 죄수와 싸움을 붙었다.
일제강점기 이성순의 삶에서 보다시피 그는 흔히 조직 없이 혼자 오직 주먹으로 싸웠다고 하는데,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맞는 말이다. 밀무역이나 다른 활동에도 이성순은 조직적으로까지 발전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 말은 자신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일의 성격이 그러했고, 이성순이 조직을 키우고 관리하는 데는 탁월하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또 혼자이기 때문에 싸움이 끝나면 그 자리에 있기가 어려웠다. 복수와 경찰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이를 막으려면 조직이 필요했고 권력과의 유착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실로 이성순은 혼자였기에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권력과 가깝지 않을 수 있기도 했다. 이 점은 해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시라소니가 깨끗하다는 말을 형성케 하는 데는 일제에 의한 투옥도 한몫 했음직하다.
이성순의 싸움 주특기는 공중걸이, 곧 댓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달려드는 빠른 박치기였다. 단도 던지기도 한 소식했다고 한다.
◎ 사회/김어준>
해방 후 시라소니는 어떤 일을 했나.
◑ 서해성>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해방 직후 이성순은 고향인 신의주에서 초기 북한정권성립과정에 참여했다. 그를 끌어들인 사람은 베이징에서 알고 지내던 차정삼이었다. 차정삼은 나중에 월남해서 활동하면서 이성순 등과 접촉했으나 간첩협의로 특무대에 걸려 총살되었다고 한다. 이성순은 일제 석탄공사 이층 건물을 사용하면서 권총을 차고 다녔다. 귀국하는 일본인들을 살피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신의주에서는 기독교계와 공산계열의 갈등이 불거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성순은 기독교계 학생들을 숨겨주고 남한 방송을 들어왔다는 이유 등으로 감시를 받자 탈출했다고 한다. 그는 신의주 선천 정주 평양 사리원 천결 청단을 거쳐 개성을 통해 월남했다. 그를 안내한 사람은 북측의 공작관계자였다고 한다. 46년 1월의 일이었다.
서울에 왔을 때 왈패들은 이미 분단체제 형성과장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밀접한 연관은 맺고 있는 사람은 김두한이었다. 그는 한때 좌파에 속해 활동했으나 백의사의 염동진을 만난 뒤로 입장을 전면 바꿔서 반공체제형성의 척후에서 행동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노조분쇄, 백색 테러와 암살 같은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당시 김두한을 비롯한 왈패들은 전평이 주도한 거의 모든 파업현장이나 대구폭동 등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폭력은 물론 휘발유로 태우기, 말로 짓밟기, 총을 쏘기도 했다고 한다.
세력권으로 보자면 장안의 왈패들은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미관이라는 극장을 중심으로 김두한, 명동의 이화룡과 이정팔, 종로파의 이정재가 그들이다. 화신백화점을 끼고 있는 우미관 패들은 서울 출신의 김두한('잇폰')이, 명동 시공관을 중심으로 평양 출신의 이화룡이 형성한 대동강동지회와 중앙극장을 중심으로 신의주 출신 이정팔이 형성한 압록강동지회, 종로에서 동대문시장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던 씨름선수 출신의 이천 사람 이정재('오야붕'/'동카포네')-이천 호법 유산리/중앙고보에서 휘문고보 전학/신흥대학/전국씨름대회 3연승)가 그들이다. 이성순은 고향사람들과 늘 가까웠던 듯하다. 그에게 연고란 사실 고향말고는 별로 없기도 했다. 그는 압록강동지회의 '나와바리'에 자주 나갔다. 그는 시공관 뒷골목 김밥집에서 청주를 자주 마셨다고 한다. 이 도심지역 삼각 할거구도에서 보다시피 그 무렵 왈패들의 생태는 기본적으로 극장을 포함한 상권을 중심으로 한 기생이었다. 먹고살 게 없다면 휘하 졸개들을 건사할 수도 사람을 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압록강동지회 이정팔의 제안으로 이성순은 인천 어련경매장으로 건너갔다. 그도 다른 왈패들의 운명처럼 분단체제의 철조망을 결코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이 경매장과 인천항 하역작업을 하는 자유노조를 분쇄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당시 인천항만과 부두일대의 상황이 어떠했든 '없는 놈이 없는 놈을 갈구는 일'에 앞장서게 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경매장은 CIC와 경찰, 인근 왈패들의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연이어 자유노조와의 투쟁을 통해 이성순은 압록강동지회 사람들에게 하역 작업권을 반 남짓 빼앗게 된다. 이때도 이성순은 당연히 압록강동지회를 중심으로 한 동향사람들을 휘하에 두고 일을 전개했다. 그러므로 해방 후 이성순이 전혀 조직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무렵 이성순은 서북청년단에 가입한다. 서청은 46년 11월 20일일 결성되었다. 서북지역의 월남청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서청은 해방 후 분단체제를 형성하는 반공의 살벌한 하부동력으로 기능했다. 서청은 반탁운동, 5.10 총선, 제주 4.3 사건 등을 중심으로 공포와 피비린내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단장은 문봉제, 부단장은 김성주 한관제였으며, 이화룡이 감찰부장이었다. 김성주는 김창룡과 끈을 대고 있었다. 이성순은 이 서청의 행동대장 역을 맡았다. 사무실은 동국대 근처 3층 짜리 일본인 아파트였다. 이때 서청 사무실에 삐라를 뿌리거나 하는 대학생에게 매를 심하게 쳐 죽이기도 했다. 행동대원 하나를 위장범인으로 내세웠는데, 이를 풀어준 사람은 신의주 출신 검사 오제도였다. 어쩌면 북에서 내려온 이성순으로서는 애써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49년에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20여 개 단체를 묶은 대한청년단이 조직되었다. 이승만이 아예 총재라 나섰고, 신성모가 단장, 부단장 문봉제, 서북대대장 김성주였으며, 단원은 발표대로라면 2백만 명에 달했다. 이 무렵 이성순은 주먹일생에 수치스런 일을 당하게 된다. 신성모가 발급한 증명서을 가지고 인천 사찰계로 찾아갔다가 뺨을 얻어맞아 고막이 터졌던 것이다. 이는 나중에 이정재의 동대문 패에게 당한 일과 더불어 이성순에게 두고두고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그 해 봄 33살의 이성순은 이진옥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근동 여자와 결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성순은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근처에서 인민군을 환영하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문이 열려 나온 마포교도소의 죄수들을 향해 서청 출신 군인들과 합세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도 하나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이윽고 수원으로 내려온 이성순은 김성주와 상의해서 비정규부대인 호림부대에 가담한다. 호림은 시흥에 있던 미군부대가 떠난 뒤 빈 막사에서 창설되었는데 한국전쟁 전 해주에 잠입해 활동하거나 여순사건 때 빨치산 부대에 가장 투입되었다고도 한다. 전쟁 중에 재조직된 호림의 대장은 김성주였다. 대구에 이르렀을 때 이성순은 고향 인근인 용천 사람 장도영(27살/육군본부 정보국장/준장)을 찾아가 1군단장 김백일을 거쳐 HID 김일환을 소개받는다. 이성순은 학도병들과 함께 전선으로 나아갔으나 전장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지 앞으로만 가다가 결국 부하들을 둔 채로 혼자 탈출(부하 20명 중 18명은 귀환했다고 함)하게 된다. 그 뒤 김일환과 함께 북진하던 중 묵호 인근에서 30명 가량의 인민군과 조우해서 기습 사살하고는 함흥까지 올라갔다. 함흥에서 포로 20여 명을 잡았는데 이성! 순은 이들을 취조하는 일을 맡았다가 모두 자기 손으로 사살해버린 뒤 김일환에게는 헌병대로 이송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지만 곧 후퇴가 시작되면서 그 일은 유야무야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확인해볼 길은 없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일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정당화 속에 인간적인 면보다는 살인마저도 무용담처럼 회자되었고, 그런 만큼 과장은 피할 길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정이야 어떻든 실로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해방과 함께 곧 이은 분단체제의 맨 하층이자 행동대로 활동해온 왈패들 중 상당수는 이 길을 벗어나기 어려운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왈패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이들을 권력의 정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해온 정치인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기본적으로 이들은 민중들이었고, 결코 지배자가 될 위치에 있거나 그러한 자격요건 또한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 대부분도 다른 의미에서 희생자적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닥 그릇된 말만은 아닐 것이다.
◎ 사회/김어준>
그래도 이것 하나는 궁금하다. 흔히 사람들은 시라소니가 김두한이나 최영의 등과 맞짱을 뜨면 누가 이길 것인가 궁금해하는데, 어떤가.
◑ 서해성>
그러한 호기심을 가질 법하다고 여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지만 그건 정말 한심한 호기심이다. 제 아무리 주먹이라지만 싸움에는 늘 조건이 있는 법이다. 해방 이후 김두한과 이성순은 우미관 일대에서 조우한 적이 있다. 이성순이 김두한의 영역(나와바리)에 들어갔다고나 할까. 이미 김두한은 분단체제의 정치권력 형성기에 깊이 개입해 있어서 정치인 이상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김두한은 굳이 이성순과 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이성순과 맞붙어 한번 더 '맞장의 짱'이거나 '다찌왕'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건 별반 없었다. 그건 무협지적 상상력일 따름이다. '강호'를 평정하기 위해 모월모시 만나 한판 뜬다는 식의 사고 자체가 말이다. 이날 김두한은 이성순을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고 한다. 나이도 이성순이 다섯 살이나 위였다. 남한의 정치주먹들은 그들의 말에 따르면 큰 조직의 경우 휘하에 1만 명 이상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다. 참으로 거대한 조직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학 속에 조직이 없었던 이성순은 주류가 아니었다. 조직을 거느린다는 것은 돈을 포함해 상당한 관리 능력 또한 지니고 있어야 하는 법이! 다. 더구나 이성순은 서울에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해방 후 그는 신의주에 있다 남하해서 명동 중에도 압록강동지회라는 동향사람들과 연대를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단지 '주먹으로만 따진다면' 이라는 전제가 벌써 성립키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 뒤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줄여서 '소니 형'이라 다감하게 불렀다고 한다.
◎ 사회/김어준>
이제 왈패들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시라소니가 진보당 조봉암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경호를 맡았다고 하던데.
◑ 서해성>
이것이 이성순이 오늘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평가받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른바 '야당주먹'으로 이윽고 그는 활동했다. 서북청년단이 분열하면서 김성주가 떨어져 나오고 이성순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 52년의 부산에서의 일이다. 사실 서청이나 HID에서 활동한 사람이 조봉암을 경호한다는 것은 조금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성순이 김성주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전혀 고민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결단은 어떤 형태로든지 사고의 전환과 가치관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이성순이 신익희 장면이 정부통령 후보로 나선 선거에도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경호책임자로서 그는 정의단 민족자결단 백골단 땃벌떼이라 불린 이승만에 고용된 정치 폭력배인 관제 데모단들을 막았다.
그를 조봉암에게 불러들인 선배 김성주는 54년 국가변란 혐의로 당초 7년형을 구형 받았으나 궐석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때는 이미 김성주가 원용덕의 지시로 임정수에게 살해된 뒤였다. 재판은 집행해버린 사형을 추인하는 요식적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김성주의 죽음은 전시 유엔군이 한 평북 지사대리 임명, 서북청년단 내분, 김구의 암살 배후 폭로 위협 등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사회/김어준>
그 뒤 시라소니의 삶에 대해 말해달라.
◑ 서해성>
전시 부산의 경제는 광복동과 서면 하이야리 부대에 미제 군수품 유통이 좌우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성순은 얻어맞고 있는 이정재를 구해주었다. 그 뒤 조봉암의 선거에서 활동하고 53년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찾아가 월남한 동향사람들에게 시장에 자리를 내달라고 요청하려다가 이정재 패들에게 손도끼에 찍히는 등 심한 구타를 당한다. 복수의 칼을 갈면서 이성순은 공수부대 전신인 낙하산 부대 창단에도 참여한다.
신익희 장면 후보의 선거유세 경호책임자로 활동하던 이성순은 호남선에서 신익희의 사망을 목격한다. 나중에는 조병옥의 선거운동도 돕는다.
기독교에 들어 주먹을 씻고 산 것은 5.16 쿠데타 직후였다. 그 직접적 계기는 깡패일소정책 때문이었다. 이성순도 국토건설단에 동원되어야 하는 처지였다. 다행스럽게 거지왕 김춘삼이 운영하던 유도장을 얻어 교회로 만들었던 일로 그는 풀려나게 된다.
◎ 사회/김어준>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한다면.
◑ 서해성>
조세형의 말을 빌리면 거지왕초 김춘삼의 경우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을 듣지 않으면 두들겨 패서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고, 정부나 사회단체에서 보내는 성금과 물자도 착복했다고 한다. 자동차 수리소에서 일한 고희경(구마적)은 차를 들어올릴 만큼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엄동욱(신마적)은 일제 북지사령관의 양아들로 행세하고 다녔다. 일본에서 대학에 다닐 때 사령관의 아들이 자신의 친구였던 터다.
임화수는 여주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권중각이다. 생부가 사망한 뒤 모친이 임씨에게 재가했다. 의부는 조라치-극장광고간판을 짊어지고 다니는 홍보일꾼-였다. 모친은 동대문시장에서 팥죽을 팔았다. 임화수는 조라치의 깃대잡이였다. 21살에 소매치기로 개성형무소에 2년, 24살에 장물취득 혐의로 2년을 옥살이했다. 그는 옥에서 기상과 취침나팔을 불었는데 제법 구슬픈 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달리 배운 것은 없어도 어쨌든 극장이 좋아 극장 주변에서 알이 굵어온 딴따라였던 것이다. 그는 23년 만에 필생의 꿈이었던 미나도극장을 인수받기에 이른다. 미나도극장(일본인)->제일극장(적산 불하/좌파 인사 소유)->평화극장(임화수). 그쯤에서 만족했더라면 임화수의 마지막이 그토록 비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승만의 권력에 흡착해 기생했고 예술인들을 동원해서 이승만을 위한 선동과 부정에 내몰았으며, 배우들의 영화출연과 작품선정까지도 장악하는 패악을 저질렀다.
이 몇 가지 인생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당시의 시대상황과 이들의 손짓발짓이 다 보이는 듯하다.
◎ 사회/김어준>
이제 정리하자.
◑ 서해성>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구사회 최하층 중에서 부정적이고 부패한 부류로 그들은 때로는 무산혁명적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전체적인 생활상황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매수되어 행동하는 것에 더욱 만족해한다.' 그들은 '용감하고 투쟁적인 성격'을 지녔는가 하면 동시에 '해이하고 나태한 성격' 또한 지니고 있다. 그들은 비규범적이고 우발적이며 기개와 신의를 중시하는 듯하나 범죄나 이익의 유혹에 종국적으로 기울고 만다. 체면과 자존심을 과시적으로 집착하고 중시하는 이들은 그만큼 단순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논리적이거나 사고가 체계적이기보다 감정적이었으며, 맹동적 충동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왈패집단 속에서 또한 그렇게 훈련되어 갔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활용에 더 없이 용이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민중출신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것은 비극적 조건이고 피아를 떠나 당연히 불행이었다.
분단 이후 한국의 왈패는 정치권의 분단체제 형성과 권력유지를 위한 활용과 그에 따른 기생의 역사였다. 여기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말하는 '멋'은 실상 조작된 이미지에 가깝다.
소설가 강용준이 남대문 시장 '폐양식 랭면집'에서 만난 이성순의 인상은 이렇다. 이때는 이성순이 필시 '주먹세계'에서 은퇴한 뒤였을 게다.
'허름한 차림의 중년 사내 하나가 물론 병신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그렇다고 절대로 온전한 걸음걸이로는 보이지 않는 그런 걸음걸이로 식당 입구 쪽에서 슬며시 안으로 들어섰다...어딘지 몹시 꾀죄죄해 보이고 워낙 가느다란 허리통이 그나마 허리띠로 바싹(바짝) 졸라매 놓아서 두 손바닥을 펴 감으면 그대로 손안에 들어올 것 같은 그런 비쩍 마른 중년 사내 하나가...이따금 극히 조심해서 한 장씩 꺼내주는 지폐를 조용히 받아서 넣기도 하며 냉면을 시켜 먹었다...당시만 해도 그런 상이군인들이 상당히 많았고 또 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며 얻어먹었다...그 사내야말로 시라소니였던 것이다.'
이성순에 대한 연민과 비애가 묻어나는 이 기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시라소니 이성순은 두 칸 짜리 셋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바람과 구름, 그 풍운의 시대를 살았다.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라 그 세대 서민대중, 민중들의 삶이기도 했다. 일제와 해방공간의 남과 북 ,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체제를 거치면서 그가 감당해야 했던 몫은 우리네 삶과 역사의 일부다. 일본사람과 싸우는 그에게 박수한 건 우리가 나라를 잃어버린 까닭이었고, 분단은 그에게 남과 북을 선택해서 자신을 파멸적으로 소모하도록 했으며, 그것은 당하는 자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해자에게도 고스란히 비극이었다. 이들 젊은이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동원되어 체제폭력으로 활용된 일은 반드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대목이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가운데 이성순이 보여준 삶의 궤적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내 조봉암이나 신익희를 위해 활동한 것이나 종교에 자신을 의탁한 일도 기본적으로는 반성적 사고와 태도에서 비롯되었음직하다.
오늘, 왈패들에 대한 폭력 판타지가 아니라 그 진실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와 사회상을 빼버린 채 판타지를 조작하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태도다.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때로 판타지를 '제거'할 수도, '멋'을 조금은 사그라지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멋'은 전도된 것이라는 걸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멋'에만 매달려 있기에는 그 시대 우리 사회의 고통이 너무도 크고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앞으로 또 다른 시라소니의 팔짜가 나오는 일도, 다시는 우리 젊은이가 달리는 특급열차에 매달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식민지의 고통과 일자리가 없어 돈벌이를 위해 목숨을 걸거나 주먹에 의지해야 하는 시대는 불행 그 자체다-이성순을 판타지가 아닌 삶의 관점에서 반추해본 것이다. 이것이 그 시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소박한 출발점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그에게 시라소니만이 아니라 이성순이라는 선량하기만 한 이름을 돌려주고 싶다고나 할까.
▶진행:김어준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98.1MHz 월~토 오후 7시~9시)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162)
<ⓒ CBS 노컷뉴스 www.nocut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