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와 書藝 / 終南別業 - 王 維
종남산의 별장[終南別業]王 維(왕 유)
中歲頗好道 (중세파호도) 중년에 자못 도를 좋아해
晩家南山陲 (만가남산수) 만년에 종남산에 집을 지었네
興來每獨往 (흥래매독왕) 흥이 나면 매양 홀로 다니니
勝事空自知 (승사공자지) 좋은 일은 나만이 안다네
行到水窮處 (행도수궁처) 걸어서 물 다하는 곳에 이르러
坐看雲起時 (좌간운기시) 앉아서 구름 피어오르는 것 바라보네
偶然値林叟 (우연치림수) 우연히 숲 속 늙은이 만나면
談笑無還期 (담소무환기) 담소하느라 돌아갈 줄 모르네
<註釋>
① 終南別業(종남별업) : ‘終南(종남)’은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왕유가 은거하던 망천(輞川)별장이 있는 곳이다. ‘終南別業(종남별업)’은 이 망천별장을 가리킨다.
➁ 頗(파) : ‘자못 파, 치우칠 파’자로 ‘조금, 약간, 치우치다, 바르지 못하다’ 등의 듯이 있다.
➂ 道(도) : 佛道(불도)를 말한다.
➃ 南山(남산) : 섬서성陜西省의 서안西安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을 가리킨다. 중국 대륙 북서부 지역인 ‘신장新疆 위구르족 자치구’에서 뻗어 내린 진령秦嶺산맥이 관중분지關中盆地를 지나 이곳 남쪽 끝자락에서 끝났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진령산맥은 중국을 화북華北·화남華南으로 나누는 주요 산맥이다.
➄ 陲: ‘변방 수’자로 ‘변방, 위태하다, 변경, 근처, 부근’ 등의 뜻이 있다.
➅ 勝事(승사) : ‘이전에 있었거나 해 놓은 훌륭한 일’을 뜻으로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➆ 水窮處(수궁처) : 산속의 시냇물이 비롯되는 수원지(水源地)를 의미한다.
➇ 値: ‘값 치’자로 ‘값, 값하다, 가지다, 만나다’ 등의 뜻이 있다.
➈ 林叟(임수) : 숲의 노인, 나무하는 노인
<解說>
이 시는 종남산 별장에서 은거할 때의 한적함을 그린 작품이다. 시인은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상심傷心하는 일이 있었지만, 불교가 있어 어린 시절을 잘 보낼 수 있었다”고 고백했듯이 그의 일생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불교로부터 위안을 얻었으며 40세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참선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수련首聯에서 시인은 중년부터 불교가 좋아져서, 만년이 된 지금 종남산 기슭에 살 집을 마련했다고 했다.
그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겪은 뒤 명리名利를 다투는 현실세계에 염증을 느껴 종남산의 망천輞川에 별장을 짓고 은거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여 대자연을 노래하였으며, 선禪의 느낌이 다분한 시들을 많이 남겨 시불詩佛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은 기분이 내키면 홀로 길을 나서서 좋은 일이 있어도,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그저 혼자 알 뿐이다. 발길 가는 대로 냇물이 끝나는 곳까지 갔다가 다리를 쉬며 구름이 피어나는 곳을 바라보며 전원에서 은거隱居하는 즐거움을 읊었다.
미련尾聯에서 산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나무하는 노인을 만나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서로 나누다보니 어느덧 집에 돌아가는 시간을 잊고 말았다며 시인의 진솔한 심정을 나타냈다.
이 중 ‘行到水窮處(행래수궁처) 坐看雲起時(좌간운기시)’ 구절은 최고의 경구(警句)로 칭송받는다
당나라의 왕유(王維)는 귀향의 원조이다. 그는 중년의 나이에 불교에 귀의해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힐(維摩詰)을 닮고자 자(字)까지 ‘마힐(摩詰)’이라고 지었다. 왕유는 안록산의 난 때 반란군의 포로가 된 연유로 뒤에 관직을 박탈당하면서 속세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하여 만년에 도교와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종남산(終南山) 기슭 망천(輞川)에 별업(別業)인 망천장(輞川莊)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으면서 살았다. 여기서 말한 별업은 원래 사는 집 외에 주로 휴양을 위해 주변 경관이 좋은 곳에 따로 마련한 별장과 같은 집을 말한다.
망천은 장안(長安)의 동남쪽 남전산(藍田山)과 요산(嶢山)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당시 불교의 영향으로 자연 속에서 도를 논하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에 풍광이 빼어난 이 지역은 명사들의 별장소재지로 각광을 받았던 모양이다. 왕유도 초당의 시인이었던 송지문(宋之問)의 별장을 사들여 자신의 별장인 망천장으로 꾸몄다. 그는 정자인 죽리관(竹里館), 임호정(臨湖亭), 문행관(文杏館) 등과 언덕인 근죽령(斤竹嶺), 호수인 백석탄(白石灘) 등 20곳의 명소를 망천20경(景)으로 불렀다. 망천장의 명소를 보고 지은 오언절구로 된 20 수의 시를 별도로 묶은 시집이 ‘망천집(輞川集)’인데 그의 시집 중 가장 유명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죽리관’이란 시도 그 중의 하나이다. 또한 망천장의 빼어난 12풍경을 그린 그림이 ‘망천도(輞川圖)’라는 화첩(畵帖)이다. ‘망천도’는 진본이 없어졌지만 역대 이름 높은 화가들이 그린 모사도가 많이 전한다.
오늘 소개하는 이 시에서 왕유는 망천장에서 은거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그림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먼저 은거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 뒤의 여섯 구에서 일상생활을 그렸는데, 세상과 더불어 다툼이 없는 탈속의 경지를 지향하면서 자연에 묻혀 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잘 담아내고 있다.
왕유(王維, 699~759)
당대(唐代) 제일의 산수전원시인(山水田園詩人). 그는 남종화의 시조(始祖)로 추앙을 받았으며, 이백(李白, 701~762)을 시선(詩仙), 두보(杜甫, 712~770)를 시성(詩聖)으로 부르는데 비견하여 시불(詩佛)로 불렸다. 북송의 소동파는 왕유의 작품을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畵]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畵中有詩]”고 평하기도 했다. 저술로 ‘왕우승집’6권과 ‘육조능선사비명’등 선승들의 비명(碑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