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0) 태조 1
조선왕조실록(10) 태조 1
조선 개국과 대재앙의 씨앗 잉태.
이성계는 정도전과 의기투합한 지 10여 년 만에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즉위한 후 명나라 주원장이 낙점한 조선이라는 국호(1. 조선 2. 화령 중 하나를 정해달라고 한 것)로 새 나라를 출범시키고 이숭인 등 정몽주의 측근 8명의 학자를 곤장으로 쳐 죽이는 등 반혁명 세력의 핵심 분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함과 아울러 공이 있는 자들을 개국공신으로 임명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공이 누구 못지않게 큰 이방원 등 그 아들들을 하나도 공신으로 선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세자 책봉 문제와 더불어 훗날 벌어질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이성계는 부인이 둘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6남 2녀를 남긴 후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사망했고 둘째 부인은 2남 1녀를 낳고 조선의 중전이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이 된 후 자연스럽게 세자를 책봉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장자인 이방우가 세자가 되지 못하므로(이방우는 한량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함)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이 크고 왕제를 갖춘 이방원이 세자가 될 것으로 예측했으나 예상을 뒤엎고 둘째 부인인 중전의 막내 아들 방석이 세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중전의 욕심, 정몽주를 쳐 죽인 이방원을 꺼린 이성계, 재상 주의를 실현하려는 정도전 등의 이해가 합치된 결과였고 이성계는 이방원의 반발 정도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충분히 제압 가능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몽주를 쳐 죽이는 광기를 보고도 그 집요함과 과감함을 간과한 것으로 이러한 세자 책봉은 결국 훗날의 2차례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의 빌미가 되고 맙니다. 이성계도 여자의 치맛바람에 헐떡거려 아들 8명 중에 어린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니 어쩌면 作法自斃(작법자폐) 즉, 지는 자기가 찌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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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望聞問切(망문문절) / 조선왕조실록(10)|작성자 구름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