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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엿장수가 된 효봉스님 이야기.

jahun 2023. 10. 21. 01:29


偈 頌(게송) (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 외우기 쉽게 게구(偈句)로 지었다.)

壹 步 貳 步 三 四 步,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不 落 左 右 前 後 去, 전후좌우 어디에도 떨어지지 말고 가라!

若 逢 山 盡 水 窮 時, 산이 다하고 물이 마른 곳 만나거든,

更 加 壹 步 是 好 處!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좋은 곳이네!

※1888년 이찬형(1888-1966)은 평남 양덕 군에서

수안이씨(遂安李氏)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영리해서 신동이라 불렸다.

열두 살 때까지 선비인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워 익혔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귀여워했던가는

다음과 같은 일로 미루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열세 살 되던 해 정월 보름날, 동무들과 밖에서 연날리기를 하다가

집에 돌아와 인절미 세 개를 먹은 것이 그만 관격이 되어 빈사의 지경에 빠졌다.

의원들이 와서 보고 마지막 수단으로 정수리에 쑥뜸질을 했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그때 쑥으로 뜬 흉터가 뒷날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집안에서는 울고불고하던 끝에 아주 죽은 줄 알고 이불에 말아 한쪽에 치워 놓았었다.

귀염둥이 손자가 죽은 것을 보자 상심한 할아버지는 홧술을 폭음한 나머지 그길로 돌아가셨다.

갑자기 줄초상이 나서 집안이 온통 뒤집혀 있는데 그때 마침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삼촌이 부득부득 어린 조카의 시체를 보겠다고 이불을 헤쳤다.

그러자 죽은 지 스무 시간이 넘은 찬형의 몸에 온기와 맥이 뛰고 있었다.

이때 일을 두고 그는 가끔 “나는 아무래도 그때 할아버지의 운명을

대신 받고 살아난 것만 같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914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판사가 되어 함흥 지방법원에 근무하였다. 법관 생활 10년이 되던 해

재판 과정에서 조선인(독립투사)에게 어쩔 수 없이 사형선고를 한 후 거기에 대한

자책(自責)과 회의(懷疑)를 가지게 되어 법복(法服)을 벗고 무조건 법원을 떠났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생계를 위해 입고 있던 양복을 팔아 엿 장사를 3년 동안이나 하였다.

그는 거기에서도 회의와 고뇌는 여전하여 1925년 38세 때

금강산 신계사에 조실(祖室)로 있는 석두(石頭) 스님을 찾아갔다.

이렇게 석두 스님께 찾아간 그는 석두 스님의 문하(門下)에서 도를 닦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자 석두 스님은 중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석두 스님은 엿장수 사나이가

남다른 데가 있음을 보고 조용히 그를 불렀다. “자네 나이가 마흔에 가까웠지?”

“예, 서른아홉입니다.” “그래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중이 되고 싶단 말이지?” “예!”

사나이의 대답이 떨어지자 석두 스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엿장수 사나이를 데리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

논두렁 한가운데 이르러 발걸음을 멈춘 스님은 소매에서

바늘을 꺼내들고는 뒤따라오던 엿장수 사나이에게 말했다.

“자, 두 눈을 꼭 감게, 자네가 두 눈을 감으면

내가 이 바늘을 논 가운데로 던질 것일세,”

그러고 나서 “에-익~” 하면서 바늘을 어디론가 던졌다.

“자 이제 눈을 뜨게, 그리고 내가 방금 던진 바늘을 찾아오게.”

“예에? 아니 저더러 이 넓은 논에서 그 바늘을 찾아오라고요?"

그러자 스님은 바늘을 찾아오면 자네 소원대로 중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엿장수 사나이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바늘을 찾는 길만이

그가 스님이 되는 길이며 석두 스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기도 하였다.

그는 곧 바짓가랑이와 소매를 걷어붙이고 논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채 아무 불평 없이 오로지 바늘 찾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 하였다.

이렇게 사흘 낮과 밤이 흘렀다. 마침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엿장수 사나이는 논바닥 흙 속에서 가느다란 쇠붙이를 찾아냈다.

밤이 깊어 신계사 스님이 모두 잠든 시각에 엿장수 사나이는 스님에게 달려가서

다급한 목소리로 “스님! 스님! 주무십니까? 바늘을 찾아냈습니다,”라고 외쳤다.

흙으로 뒤범벅이 된 엿장수 사나이의 손끝에는 논에서 건져낸 바늘이 호롱 불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자 스님은 내가 약조를 했으니 자네를

중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엿장수 사나이는 마침내 삭발 출가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끊임없는 수행을 거듭하여 1962년에는 한국 불교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는 신화를

일구어냈는데 이 스님이 바로 효봉스님이다. 효봉스님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나중에 동료 판사가

절에 들어와서 효봉 스님을 알아보고 그 사연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였다.

그의 제자로 유명한 사람은 구산 스님, 법정 스님, 그리고 고은 시인 등이 있다.

- 받은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