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29)노을진 둑방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29)노을진 둑방길
덕 많이 쌓기로 온 동네 소문난 초옥댁
집 별당 안에선 악취가 진동하는데…
사람들은 초옥댁을 적덕(積德)부인이라 부른다. 덕을 많이 쌓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로 찾아가는 곳은 독거노인의 집이다. 부양해줄 자식도 없이 불편한 몸으로 홀로 사는 노인의 집에 가서 허드레옷으로 갈아입고 방 청소를 하고 어지럽게 던져놓은 빨랫감을 싸들고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오고 가마솥에 물을 데워 노인의 몸을 씻겨준다. 뿐만이 아니다. 온갖 밑반찬을 만들어가고 추울 땐 두툼한 솜옷, 더울 땐 시원한 모시옷을 지어간다.
초옥댁은 과부다. 몇년 전 천석꾼 부자 박 대인의 삼년상을 치른 후 상복을 훌훌 벗어 태워버리고 아침 수저를 놓으면 덕을 쌓으러 대문을 나선다. 홀로 사는 노인의 집에 가면 방이 냉골이라고 장작을 우마차에 바리바리 실어다주고 동짓날은 팥을 한자루 사와서 손수 팥죽을 써주고 마룻장이 꺼지면 제 돈 들여 목수를 불러왔다.
단옷날은 고을의 잔칫날이다. 남녀노소 함께 모여 질펀한 잔치를 벌이기 전에 고을 사또가 연단에 올라 단오잔치 개회를 선언하고 맨 먼저 초옥댁에게 적덕상을 수여했다. 부상으로 비단 세필을 내리자 백사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멈출 줄 몰랐다. 강변 드넓은 백사장에 그네를 타는 여인네들의 치맛자락이 하늘 위에 펄럭이고 모래판 위에서는 장사들이 샅바를 잡아당기느라 숨소리가 거세다. 차양막 아래선 둥근 술상을 가운데 두고 사또와 고을 유지들 그리고 육방관속이 빙 둘러앉고 사또 옆에는 초옥댁이 자리했다. 사또가 말했다.
“글 잘하시는 이 초시께서는 적덕비의 문장을 지어주시고 천하달필이신 유 진사께서는 일필휘지 비문을 써주시고 이방은 다섯자 오석을 구하고 석장을 불러오도록 하라.”
초옥댁이 손사래를 치며 펄쩍 뛰었지만, 사또의 결심을 꺾을 수가 없었고 고을 유지들도 박수로 사또를 격려했다.
며칠 후 늦은 밤, 술에 취한 이방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동네 골목길을 도는데 길모퉁이에서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이 불쑥 나타나 이방에게 서찰을 전해주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술이 확 깬 이방이 집에 가서 호롱불 아래서 서찰을 뜯어 읽으며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초옥댁, 그 구미호 같은 년의 적덕비를 세우기 전에 그 집 후원 죽림 속의 별당 안을 한번 들여다보시오.’
이튿날, 이방은 사또에게 그 서찰을 보이고 사또의 지시대로 몰래 초옥댁 집의 담을 넘었다. 그날도 초옥댁은 적덕을 하러 나갔고 초옥댁의 질녀만이 대청마루에 기대앉아 정신없이 자수를 놓고 있었다. 이방은 고양이 걸음으로 대나무밭에 숨어들었다가 자수 놓던 질녀가 점심을 먹고 낮잠에 빠진 틈을 타 별당 문을 살며시 열었다.
“웁!”
이방은 얼른 문을 닫았다. 병들고 굶주린 들짐승 같은 노파가 사슬에 묶여 쭈그리고 누워 있는데 악취가 코를 찔렀다. 치매에 걸린 초옥댁의 시어머니였다. 밤길에 이방에게 서찰을 준 사람은 시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반면에 이방이 초옥댁에서 삼십여년 동안 찬모로 일했던 노파를 찾았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그 시어머니가 개 같은 대접을 받아도 싸지요, 싸고 말고요”다.
기울어진 양반집의 딸이던 초옥댁은 표독한 시어머니로부터 갖은 모멸과 학대를 당했다. 친정어머니가 가난에 찌들어 약 한첩 못 써보고 누워 있는데도 초옥댁은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지 못해 친정에 가지 못했다. 보름도 지나지 않아 친정어머니가 죽었다는 부고를 받았다.
삼거리 둔덕에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징 이며 꽹과리 소리 요란하게 사물놀이패가 한바탕 놀고 나서 사또가 올라서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꽹과리가 깨갱 갱 깽깽거리다가 지~잉, 징소리 크게 울리자 사또가 줄을 잡아당겼다. 광목천이 벗겨지면서 새까만 오석으로 만든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떠나갈 듯 박수가 쏟아지는데 주인공인 초옥댁이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비문 맨 위에 ‘적덕효행비(積德孝行碑)’라고 음각돼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을 가다듬은 초옥댁이 비석에 다가가 비문을 읽으며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초옥댁은 밖으로는 끊임없이 덕을 쌓고 안으로는 시부모에게 지극정성 효행을 하니….’
며칠 후, 강둑길에 보료를 깐 손수레에 초옥댁 시어머니가 깨끗하게 차려입고 비스듬히 기대앉아 석양에 붉게 물든 강물을 내려다보며 싱글벙글 웃음을 달고 있었다. 손수레를 미는 사람은 초옥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