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08)복조리

jahun 2022. 1. 22. 21:04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08)복조리

오 생원 때문에 거래 망친 죽 대방

며칠 지나 뜻밖의 전갈을 받는데
 
대를 이어 한평생 담양죽세공품 장사로 잔뼈가 굵은 죽 대방은 성질 급한 것 하나만 빼면 허우대 멀쩡하고 의리 있고 통이 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반겼다.
삼년 전, 고창 주막집 객방에서 깊은 잠에 빠졌는데 노름판에서 돈이 떨어진 오 생원이 객방으로 들어와 죽 대방을 흔들어 깨워 돈 빌려달라고 떼를 썼다. 죽 대방이 비몽사몽으로 그를 밀치자 왜소한 오 생원이 마당에 나가떨어져 기절해버렸다. 주막이 발칵 뒤집혔다. 주모가 찬물 한바가지를 오 생원 얼굴에 갖다 퍼붓자 정신을 차렸다. 노름하던 사람들, 술 마시던 사람들, 잠자던 사람들 모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오 생원을 둘러싸고 앉았다. 죽 대방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 생원~미안하게 돼부렀소. 맨정신으로 그런 게 아니고.
오 생원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대답했다.
~, 무슨 소릴 하는 게요. 내가 오히려 미안하재잉~.
새로 술판이 벌어졌다. 죽 대방이 쐈는데, 오 생원은 술도 마시지 않고 객방 구석에 쪼그려 새우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오 생원이 일어나질 못했다. 머리가 아프다며 주모가 갖다준 노끈으로 머리통을 바짝 조여 맸다. 죽 대방도 쉬겠다며 장에 가지 않고 오 생원 옆을 지켰다. 오 생원은 당나귀 한마리를 데리고 다니며 남의 짐을 실어주고 짐삯을 받는 게 생업인데 허구한 날 주색잡기에 빠져 주막집 객방에서 뻗어 자는 날이 일하는 날보다 많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보니 오 생원은 살아온 길도 기가 막혔다. 혼례를 올리고 보부상을 따라다니다 석달 만에 집에 오니 새색시가 도망가고 없어졌더란다. 그 길로 집도 절도 없이 당나귀 한마리 데리고 이 주막 저 주막 다니며 살아왔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는데 죽 대방보다 두살 위인 서른한살밖에 되지 않았다. 죽 대방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 형, 내가 새경을 섭섭지 않게 드릴 테니 지금부터 나하고 일합시다. 술은 가끔 하더라도 노름은 절대로 하기 없기요잉~.
죽 대방은 오 생원이 진 빚을 다 갚아주고 이 주막 저 주막 밀린 외상값도, 외상 해웃값도 다 갚았다. 그러고 나서 오 생원을 데리고 담양 집으로 가 아래채 건넛방을 줬다. 오 생원도 양심은 있었다.
이 당나귀는 오늘부터 죽 대방 것이고 세해 동안 새경도 안 받을 터이니 밥이나 먹여주게.
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그게 삼년 전 얘기다. 그동안 제때 밥 챙겨 먹은 오 생원은 부옇게 살이 오르고 당나귀도 윤기가 났다. 오 생원과 손잡은 죽 대방의 장사는 불같이 일어났다. 죽 대방은 춘삼월에 몇년 전 과부가 된 누이와 오 생원을 짝을 지어주려고 점쟁이로부터 택일해 날까지 받아뒀다. 그리고 제물포의 죽세공품 거상과 거래를 터 담양에서 매집한 죽세공품을 바리바리 싣고 장성·고창을 지나 줄포에서 배편으로 제물포에 보냈다.
죽세공품 거상 박 대인이 동짓달에 서찰을 보내왔다. 복조리 팔천개를 그믐날까지 제물포에서 받도록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단가도 좋았다. 죽 대방은 입이 벌어져 이 집 저 집 선금을 주고 제 날짜에 물건을 맞춰 보내려고 작업을 독려했다. 복조리는 원래 정월 보름에 팔리는 물건이다. 복조리 만드는 다섯 집 모두 밤을 새워 겨우 줄포까지 가는 시간을 맞췄다. 죽 대방은 달구지 하나 마련하고 오 생원의 당나귀를 준비해 닭이 울자 마당에 횃불을 밝혔다. 죽 대방 아내는 국밥을 내왔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죽 대방이 건넛방 문을 쾅 열어젖히자 오 생원이 머리를 감싸쥐고 방구석에 처박혀 중얼거렸다.
아이고, 죽겠다. 머리가 깨어지는 것 같은데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일어설 수가 없네~.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죽 대방이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고함을 치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당나귀 고삐 잡지 않고 뭐해!
죽 대방이 이번에는 아내에게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아내가 고삐를 잡자 당나귀가 펄쩍펄쩍 뛰더니 복조리 수천개 묶음이 마당에 떨어졌다. 죽 대방이 장작을 치켜들고 당나귀를 내려치니, 에헹~당나귀가 집 밖으로 도망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죽 대방 마당에 불길이 솟구쳤다. 제 성질을 못 이겨 복조리 더미에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죽 대방은 동구 밖에서 여드레 동안 술만 퍼마셨다. 아흐레째,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부스스 일어난 죽 대방이 또 술을 시작하는데 주모가 소리쳤다.
죽 서방줄포에서 나흘 전에 떠난 배가 풍랑에 가라앉아 한사람도 살아나오지 못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