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07)노망

jahun 2022. 1. 21. 19:58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07)노망

고향 떠나 첩과 살림 차린 조대감 어느 날 본처 소식 듣고 놀라는데
 
조 대감이 퇴청해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머나먼 고향, 경남 함안에서 올라온 본가 집사였다. 놀란 조 대감이 어인 일이냐?고 묻자 가쁜 숨을 몰아쉰 집사가 마님께서 편찮으셔서 밤이고 낮이고 대감님을 찾으십니다요한다.
조 대감이 꼬치꼬치 물어보고 유추하니 부인이 실성한 것 같았다. 그날 밤, 자작으로 술을 마시며 상념에 젖은 조 대감은 생전 처음으로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겼다.
조 대감에게는 두아들이 있는데 첫째는 고향집을 지키며 제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둘째는 급제해 산청 사또로 봉직하며 가끔 함안 집을 찾아 제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린다. 손자·손녀들 재롱을 보며 세상에 둘도 없이 편하게 살아가겠지 생각했던 부인이 실성을 하다니! 조 대감은 밤마다 혼자 술을 마시며 한평생 살아온 길을 되돌아봤다.
천석꾼 부자 아버지는 일찍이 급제해 나라의 녹을 먹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어린 시절 조 대감, 천동이는 다섯살에 <동몽선습> <사자소학>을 떼고 열두살에 사서를, 열다섯살에 삼경을 뗐다. 양반 부자 세도가 집안에 빼어난 글재주에다 훤칠한 키에 어깨는 떡 벌어지고 얼굴은 이목구비가 시원한 호남형에 언변 또한 좋았다. 그뿐이랴, 통 크고 인정 많고 의리 있어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 단 하나 결점이 있었으니 여자를 너무 밝히는 것이었다. 벌써 열세살 때 훈장님의 처제와 정을 통하더니 깊은 밤 제집의 과부 침모 방을 들락거렸다. 어떤 때는 본서방이 낫을 들고 달려들어 담 넘어 삼십육계를 놓았다가 삼촌이 돈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천동이는 열다섯에 혼례를 올렸다. 양반 대갓집에서 시집온 열일곱 새 신부는 예쁜 얼굴에 마음씨 착한 요조숙녀였다.
신혼생활 여섯달 동안은 그런대로 조용하더니 제 버릇 개 주나. 천동이는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술에 취해 하녀 방으로 들어가질 않나, 옆집 청상과부를 범하질 않나.
그러나 새 신부는 투기하지 않고 철없는 동생 뒤치다꺼리하듯 말없이 입막음했다. 그래도 천동이는 열일곱에 급제해서 한양으로 올라갔다. 성균관으로, 홍문관으로 돌다가 영월·괴산·서천 원님자리에 앉았다.
고기가 물을 만났다. 가는 족족 첩살림을 차렸다. 기나긴 세월, 그 곱던 새 신부는 눈 밑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함안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하고 시부모 상 때나 신랑 코빼기를 봤다. 그래도 아들 둘을 낳은 게 신통한 일이다.
조 대감은 혼자 술을 마시며 생전 처음으로 부인이 살아온 한평생을 더듬다 회한의 한숨을 토했다. 부인이 회복하면 다시 환궁하기로 약조하고 임금님의 윤허를 받았다. 임금님의 배려로 사인교를 타고 머나먼 고향길에 올랐다. 보름 만에 고향 함안에 다다랐을 때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적막에 싸인 고향집에 부인은 없었다. 조 대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본가를 지키고 있던 맏아들이 말했다.
황 의원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조 대감은 대청에도 오르지 않고 맏아들과 횃불을 든 하인들을 데리고 대문을 나섰다. 황 의원은 어의 밑에서도 일한, 인근 아홉 고을에서 가장 이름난 의원이다. 황 의원은 다른 의원들과 달리 저잣거리를 떠나 지리산 자락,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절간 같은 곳에 의원 본원을 차렸다.
조 대감 일행이 의원에 다다랐을 때는 밤이 깊은 삼경이었다. 황 의원은 그때까지도 의서를 읽고 있다가 크게 놀라며 조 대감을 맞았다. 조 대감과 황 의원은 손을 맞잡고 안타까운 눈길만 서로 주고받았다.
당장 보고 싶습니다.
조 대감은 조바심에 망설임 없이 앞장섰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면 안됩니다.
황 의원이 조용히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이럴 수가! 조 대감 부인이 웬 나이 지긋한 남자와 꼭 껴안고 자다가 눈을 떠 조 대감을 보더니 말했다.
우리 아들 왔구나~. 지난밤 꿈속에 나타나더니! 영감, 내가 얘기하던 내 아들이오.
그때 문지방 밖에 있었던 맏아들이 어머니~정신 차리세요라고 산천이 떠나갈 듯 고함쳤지만 부인은 들은 체 만 체하고 조 대감을 보고는 천동아, 너의 새아버지시다. 인사 올려라한다.
조 대감이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며 일어날 줄 몰랐다. 말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쏟다가 마침내 대성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