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85)의형제

jahun 2021. 12. 29. 20:0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85)의형제

막역지간우 생원과 박 진사 아들 둘을 의형제로 맺어주는데
 
우 생원과 박 진사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다. 어릴 때부터 앞뒷집에 살며 함께 서당에 다니고 수박서리·콩서리에 여름밤이면 동네 처녀들 멱 감는 걸 훔쳐보며 킬킬거렸다. 박 진사는 글공부를 잘했지만 우 생원은 공부와는 담을 쌓고 일찌감치 장삿길에 들어섰다. 우 생원이 장사 밑천 모자랄 때 박 진사네가 돈을 빌려줘 일어설 수 있었고 박 진사는 초시에 붙어 동네가 떠들썩했다. 가는 길은 달라도 두사람은 틈만 나면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우 생원과 박 진사는 장가를 가서 첫아들을 하나씩 가졌다. 어느 날 술을 마시다가 아들 둘을 의형제로 맺어주기로 했다. 우 생원의 아들 진복이가 여섯달 먼저 났으니 형이 되고 박 진사의 아들 면호는 동생이 됐다.
진복이와 면호는 부모들이 의형제를 맺어줬건만 막상 두사람은 서당에 다니며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박 진사 아들 면호는 공부를 썩 잘해서 훈장님 귀여움을 독차지했지만 우 생원 아들 진복이는 종아리에 회초리 자국이 없어지는 날이 없었다. 아들 둘은 그랬지만, 부모들은 거꾸로였다. 저잣거리에서 젓갈도매상·유기점·대장간을 하는 우 생원 장사는 불처럼 일어나는데 박 진사는 초시, 거기까지였다. 과거에 여덟번이나 떨어지더니 술독에 빠졌다가 병까지 나 드러눕고 말았다. 면호는 제 어미가 머리를 잘라 팔아 보릿자루를 이고 오는 모습을 보고서 더는 책과 씨름할 수 없었다. 저잣거리에 나가서 험한 일을 도맡아 하며 제 아버지 약값을 대고 식구들 입에 풀칠했다. 박 진사와 그렇게 친하던 우 생원은 몇번 병문안을 오더니 차츰 발길이 뜸해지다가 일년이 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빚만 잔뜩 남기고 박 진사는 삼년 만에 이승을 하직하고 이듬해 우 생원은 술에 취해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진복이는 아버지 우 생원이 남긴 막대한 재산을 뚝 잘라 팔아 매관매직 거간꾼을 통해 함경도 회령 사또자리를 차지했다. 한편 선친의 삼년상을 치른 면호는 하다가 만 글공부가 목말라 몸부림쳤지만 쪼들리는 살림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마방집에서 당나귀를 빌려서 머나먼 함경도 회령으로 향했다. 풍찬노숙을 밥 먹듯이 하며 두달 만에 회령에 도착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동헌을 찾았다. 수문장이 길을 막았다. 나는 경상도 산청에서 온 박면호라 하오. 사또인 형님을 뵙고자 하오.그러자 이방이 나와 꾀죄죄한 면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사또께서는 시찰을 나갔으니 엿새 뒤에나 한번 와보시오.엿새 뒤에 갔더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답변에 또 돌아섰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만나주지 않자 면호는 아예 관아 대문 밖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죽치고 앉았다. 회령에 온 지 스무하루 만에 서헌에서 그 잘난 의형, 회령사또를 대면하게 됐다.
요즘 공무가 어찌나 바쁜지.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우선 목이나 축이게.관기인 듯한 여인이 개다리소반을 들고 왔다. 사또는 청탁이나 하러 온 듯한 사람들과 귓속말을 주고받는데 윗목 구석에서 술상을 받은 면호가 술잔을 입에 댔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식초인지 탁배기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고 안주라고는 시어빠진 짠지 두조각이었다. 면호는 벌떡 일어나 개다리소반을 발로 찼다. 소반은 둘로 갈라져 천장을 치고 식초 술잔은 뒤집히며 술을 온 방에 흩뿌렸다. 일어나 말리려는 관기의 멱살을 잡고 귀싸대기를 갈기자 그녀는 방구석에 고꾸라졌다. 사또는 얼굴에 덮어쓴 신 탁배기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어어어~신음만 토했다.
소문이 쫙 퍼졌다. 면호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은 알아서 하라고 이방이 겁박을 주고 다녔다. 주막에서는 쫓겨나고 당나귀는 주막집 외상값으로 뺏겨버렸다. 늦은 밤 주막 담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별을 헤아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장옷을 눌러 쓴 웬 여인이 그를 깨워 데려간 곳이 그녀의 집이었다. 장옷을 벗은 그녀를 보고 면호는 깜짝 놀랐다. 면호로부터 귀싸대기를 맞고 서헌 방구석에 처박혔던 그 관기였다. 모든 남자가 그 시어빠진 술을 마시고는 술맛이 좋다고 사또에게 아부했는데 술상을 발로 차고 제 뺨따귀를 때린 남자다운 남자는 낭군이 처음입니다. 소첩의 절을 받으십시오.면호는 관기의 사저에서 한달간 숨어 지내며 진수성찬에 매일 밤 만리장성을 쌓았다. 관기가 찾아준 당나귀를 타고 두둑한 전대를 차고 고향 산청으로 내려온 면호는 이를 악물고 공부해 장원급제를 했다. 암행어사가 돼 함경도를 돌다가 회령으로 들어가 초라한 행색으로 관기를 찾았지만, 그 관기는 변함없이 그를 반겼다. 면호는 그 관기를 정실로 삼았다. 사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