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76) 바둑(하)

jahun 2021. 12. 21. 20:02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76) 바둑()

논 절반과 집마저 잃은 이 진사 왼쪽 귀 없는 장 여사 모습에
 
다음 수가 보이지 않는지 장 여사가 이마를 바둑판에 박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장 여사는 부채질을 하면서도 달아오른 열을 식히지 못해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치마를 걷어 올리곤 고쟁이를 당겼다. 회심의 결정타를 날려놓고 상대방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기다리던 이 진사는 육덕이 푸짐한 장 여사의 젖무덤에 희멀건 허벅지를 훔쳐보는 금상첨화까지 즐겼다.
삼경이 지나 사경에 접어들어 소쩍새 울음만 새벽 공기를 찢어놓는데 패색이 짙은 장 여사가 힘없이 놓은 흑돌에 이 진사가 기세 좋게 두들긴 백돌이 덜컥수가 됐다. , , 아니야, 아니야!이 진사의 비명을 조롱이라도 하듯 꼬끼오~새벽닭이 울었다. 이 진사의 문전옥답 한마지기 땅문서가 장 여사의 치마 속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소문이 온 고을에 파다하게 퍼졌다. 천석꾼 부자 이 진사에게 논 한마지기는 별것이 아니지만, 이 고을 국수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뭉개진 게 문제였다. 판이 커지고 논 열다섯마지기가 나가자 이제는 자존심보다 재산을 찾아오는 게 문제가 됐다.
이 진사가 우황청심환을 먹고 대국 장소를 자기 집 사랑방으로 옮겨 텃세 이득을 보고 친구 황 초시를 심판으로 앉혔다. 첫날 논 두마지기를 찾아온 이 진사가 판을 키워 이튿날은 다섯마지기를 찾아왔다. 다음날은 배판이 됐다. 단 한판에 논 열마지기라, 열기가 끓어올랐다. 그날은 이 진사네 찬모가 들고 온 오미자차와 수정과를 장 여사는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목이 마르면 우물에 가서 손수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려 벌컥벌컥 마셨다. 장 여사의 아슬아슬한 한집반 승으로 끝났다.
이레 만에 이 진사네 논문서가 반으로 줄어들자 이 진사 부인이 안방 장롱 속의 나머지 논문서를 싸들고 행방불명이 됐다. 이 진사네 집문서까지 장 여사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자 이 진사의 판돈이 고갈된 것이다. 서로 이기고 졌지만, 장 여사가 질 때는 만방으로 져도 판돈이 적고 이 진사가 질 때는 반집, 아니면 한두집이었지만 판돈이 컸다. 장 여사가 제안했다.
진사 어른, 뻗정다리 행랑아범의 노비문서를 논 다섯마지기 값으로 쳐드리겠습니다.
모두가 놀랐다. 벌써 혼이 빠진 이 진사는 장 여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안마당에서 행랑아범의 노비문서를 불태우자 뻗정다리를 끌며 눈물이 글썽글썽한 행랑아범이 장 여사에게 큰절을 올리려고 땅바닥을 짚었다. 장 여사가 부리나케 그를 안아 일으켰다. 이 진사의 문우들과 온 동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장 여사가 일어서서 이 진사네 집문서를 이장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집은 오늘부터 마을 재산입니다. 어르신들은 모여서 고담준론을 펴시고 아낙들은 물맛 좋은 이 집 우물물을 퍼마시고 아이들은 이 집에서 뛰어놀기 바랍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끝날 줄 몰랐다. 마지막 저녁 햇살이 대청 끝에선 장 여사를 비추자 장 여사는 쪽머리를 풀어 고개를 돌렸다. 왼쪽 귀가 없었다. 으아악~행랑아범이 비명을 지르고 이 진사가 기절했다. 장 여사가 뻗정다리 행랑아범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십이년 전, 이 진사 나이 서른여섯 때였다.찬모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애송이 부엌데기, 열다섯살 분례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점잖은 양반 대갓집 대주인 이 진사의 씨였다. 이 진사의 골칫거리가 됐다. 분례를 놀라게도 해보고 넘어뜨려도 봤지만 허사였다.
어느 날 집 안팎일을 총괄하는 젊은 집사가 분례를 데리고 장에 가다가 호구고개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분례를 안고 흐느껴 울던 집사가 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분례야! 진사 어른의 엄명이지만 내 손으로 너를 죽일 수는 없다. 죽인 증표로 귀를 잘라오라는데. 으흐흑.
분례는 당찬 데가 있었다. 집사의 칼을 빼앗아 제 손으로 왼쪽 귀를 잘랐다. 으아악!유혈이 낭자했다. 기절했던 분례가 깨어났을 때 집사가 약쑥을 잘린 귀에 대고 광목 띠를 둘렀다. 하혈이 쏟아지며 낙태가 됐다.
분례야, 멀리멀리 사라져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집사는 전대를 분례에게 건네줬다. 분례는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졌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집사는 이 진사로부터 또 다른 살인청부를 받고 나서 도망을 가버렸다. 이 진사는 추노로 잡혀 온 집사를 광에 가둬놓고 몇날 며칠 몽둥이찜질을 해 뻗정다리로 만들었다.
이십년 하고도 이태가 흘렀다. 바둑의 고수가 되는 길만이 이 진사를 나락으로 처넣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노스님 밑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경지에 오른 분례, 그녀가 장 여사로 나타났던 것이다.
뻗정다리 행랑아범을 데리고 홀연히 사라진 장 여사를 그 이후에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