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75)바둑(상)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75)바둑(상)
선비들이 사는 고고한 매화촌에 너비아니집 차린 묘령의 여인이
이 진사와 내기 바둑을 두는데 …
매화촌에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다. 개울 건너 배 초시가 살던 아담한 기와집을 사서 너비아니집을 차렸다. 산허리 한식경을 걸으면 대처의 저잣거리가 나와 주막집조차 없는 이 마을에 너비아니집이라? 어딘가로 지나는 길목도 아니오, 장사꾼 동네도 아닌 50여가구가 사는 이 조용한 막다른 동네에 너비아니집이?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삼십대 중반쯤 되는 여인은 망설임 없이 요릿집을 차린 것이다.
매화촌이란 매화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선비들이 고고한 매화를 아껴 집집마다 매화나무 한두그루는 심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선비촌이 되는 것이다. 매화촌 출신의 고관대작들을 손꼽으려면 열손가락이 한참 모자란다.
매화촌 선비들이 모이는 곳은 이 진사네 집이다. 사랑방도 클 뿐 아니라 뒤뜰 연못 가운데 날아갈 듯한 정자는 천하명당이다. 정자에 문우들이 둘러앉으면 수양버들가지가 처마 끝에서 춤을 추고 아래에선 연꽃대가 올라온다. 시조를 읊고 고담준론은 잠깐, 수담(手談)이 펼쳐진다. 이 진사가 아끼는 은행나무 바둑판에 조개껍데기 백돌, 오석 흑돌이 판을 짜면 헛기침과 한숨소리가 뒤섞이고 관전자들의 탄식이 이어진다.
작은 내기판이 이어지며 저녁이면 내기해서 모은 돈으로 대처로 나가 주막집으로 향한다. 이제는 자연히 그들의 발걸음이 가까운 너비아니집으로 향하게 됐다.
너비아니집이 문을 연 지 이틀째, 매화촌 이 진사의 수담 친구들이 바둑을 마치고 그 집으로 들이닥쳤다. 묘령의 주인 여자가 대청에서 내려와 처마 밑에서 공손히 인사를 하는데 모두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쪽머리를 올린 기품 있고 우아한 여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허리를 굽혔다. “바우야, 대문을 잠궈라.” 티끌 하나 없는 안뜰에는 청사초롱이 여기저기 불을 밝혔고 사랑방에는 열두폭 화조 병풍 앞에 자개상감 상이, 그리고 비단보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두가 얼이 빠져 상 앞에 앉자 반주로 매실주가 나오고 뒤따라 너비아니구이가 나오는데 뜨거운 돌판 위의 너비아니가 주석이 파할 때까지 식지 않았다. 부엌에서는 초로의 여인이 음식을 장만하고 몸종이 음식을 날라 주인 여자는 술을 따라주는 여유가 생겼다. 말투나 학식이 양반 대갓집 안방마님처럼 품위가 넘쳤다. 계산을 할 때 또 한번 놀랐다. 대처 주막집 돼지고기구이 값을 살짝 넘었다. 손님 한무리가 오든, 단 한명이 오든 대문을 잠가버리고 더는 손님을 받지 않아 이 진사네는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너비아니집을 차지했다.
어느 날 이 진사가 병풍 뒤쪽에 살짝 보이는 것이 궁금해 병풍을 밀치자 공단덮개, 그걸 벗기자 바둑판이!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바둑판이다. 바둑판이 방 한가운데로 나오고 주인 여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5대조께서 명나라 사신으로 가셨다가 선물로 받은 것인데 비자나무 판 위에 거북 등을 펴서 붙인 것입니다. 흑돌은 흑단이고 백돌은 상아랍니다.”
은행나무 바둑판에 오석 흑돌, 조개 백돌을 자랑하던 이 진사 코가 납작해졌다.
“장 여사, 바둑도 두시오?” 이 진사가 물었다.
“조금 둡니다. 바둑이라 할 것은 없고….”
이튿날부터 이 진사네 바둑판도 너비아니집에 옮겨놓고 아예 점심 때부터 이곳에 모여 바둑판을 벌였다. 열명도 됐다가 열두명도 되는 이 모임에서 단연 상수는 이 진사였다. 이 진사에게 넉점을 붙이고 두는 최하수 최 생원이 너비아니집 주인 여자, 장 여사와 대국을 하게 됐다. 장 여사의 간청으로 최 생원이 두점을 접어주고 대국을 했는데 최 생원의 대마가 함몰되며 만방으로 져버렸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치수 고치기로 계속 두다보니 거꾸로 장 여사가 최 생원에게 세점을 접어주게 되었다. 마침내 선비촌에서는 대적할 사람이 없고 이 고을의 국수인 이 진사와 장 여사가 마주 앉게 됐다.
장 여사의 정선(定先)으로 여덟집을 졌으니 호선이었다면 덤 다섯점 공제하고 열세집을 진 셈이다. 이 진사가 체면을 세웠다. 어떤 날은 장 여사가 몽땅 덮어써 술값·고깃값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 돈이 오가며 열이 올라 판돈은 점점 커졌다. 다른 사람들은 아예 바둑 둘 생각도 않고 이 진사와 장 여사의 벌겋게 달아오른 내기판을 구경했다. 서로 일진일퇴를 하다가 이 진사가 조금씩 밀리며 천몇백냥이 나가자 호선으로 치수를 고치고 나간 돈을 다 찾고 이제는 장 여사의 장롱문이 열리고 닫히는 게 잦아졌다.
구경꾼들이 모두 돌아가고 밤은 깊어 소쩍새 소리만 들리는 삼경인데도 이 진사와 장 여사의 내기 바둑은 끝나지 않았다. 바둑판에 코를 박고 장고에 들어간 장 여사의 젖무덤이 이 진사 시선을 사로잡더니 한쪽 무릎을 올리고 자세를 다시 잡은 그녀의 고쟁이가 이 진사의 숨을 막히게 했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