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70)뛰는 놈 위에 나는 놈<하>

jahun 2021. 12. 15. 17:09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70)뛰는 놈 위에 나는 놈<>

황 의원이 달인 보약을 먹은 손 초시 갑자기 쓰러져 말을 못하게 되는데


 
손 초시가 건네준 묵직한 전대를 받아든 달래는 걸맞은 돈값을 했다. 열아홉밖에 안된 것이 어디서 배웠는지 화려한 요분질에 장단을 맞추는 감창으로 손 초시의 혼을 쏙 빼놨다. 이튿날 아침 코피를 쏟은 손 초시가 후문을 열고 나와 의원을 찾았다.
황 의원님, 나 원기를 좀 돋워줘야 쓰겠소.
황 의원이 손 초시를 진맥하더니 처방전을 쓰며 우황·산삼·사향. 이것은 비싼 약재인데…”라고 하자 손 초시는 황 의원님, 돈 걱정 말고 푹푹 넣으시오라며 말을 받았다. 황 의원이 손수 약탕관을 별채 앞 후원에 갖고 와 화덕에 달였다.
달래는 일부러 부스스한 얼굴에 구겨진 일복을 걸치고 돼지피를 치마저고리에 바르고 머리를 헝클어뜨려서 집으로 갔다. 안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소담댁이 질색을 하더니 아서라. 게 마당에 섰거라하곤 양잿물과 소금을 달래에게 뿌리며 멀찍이 서서 물었다.
초시 어른은 어떻더냐?
말도 마십시오. 밤새도록 피를 토해 제 옷 좀 보세요, 마님.
소담댁의 얼굴이 하얘졌다. 저는 한숨도 못 잤어요.한숨 못 잤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손 초시 밑에 깔려서. 부엌에서 목간한 달래는 제 방에 가서 한숨 늘어지게 자고나서 저녁나절이 가까워졌을 때 집을 나서려 하자 소담댁이 말했다. 달래야, 먼 길을 걸어서 매일 집에 올 필요 없다.비단옷을 싼 보따리를 들고 오만상을 찌푸린 채 달래는 집을 나섰다. 소담댁이 찔러준 적지 않은 돈을 허리춤 주머니에 넣으며.
신방처럼 화초병풍에 금침을 깔고 동방화촉 아래 비단옷을 입은 손 초시와 달래가 마주 앉아 상다리게 휘어지게 차려놓은 주지육림 속에 빠졌다. 황 의원의 비법으로 빚은 한약을 달여 마신 손 초시는 그날도 술 한잔에 벌써 하초가 뻑적지근해졌다. 달래의 현란한 방중술은 밤마다 달랐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자 손 초시가 마침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돈을 우려낼 대로 우려낸 달래도 시들해졌다. 손 초시가 병석(?)에서 일어나 제집으로 들어갔다. 씨암탉백숙에 개소주가 끊어질 날이 없자 손 초시는 기운을 차리고 바깥나들이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손 초시는 황 의원을 기생집에 초대해 거하게 대접했다. 주석이 파했을 때 손 초시는 황 의원에게 주머니를 건네줬다. 집으로 돌아간 황 의원이 주머니를 펼쳐보고는 뚜껑이 열렸다. 단돈 50냥이 들어 있었다. 이튿날 사동에 이끌려 영생의원으로 간 손 초시와 황 의원은 대판 싸움을 벌였지만 손 초시가 배 째라하니 황 의원도 더 확전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 고을에서는 그래도 명의로 이름이 나 있는 터에 환자로 둔갑한 손 초시와 공모해 그런 일을 만들었다는 게 소문나면 영생의원은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황 의원의 약점을 꿰뚫어보고 있는 손 초시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적반하장, 황 의원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어느 날 밤 손 초시 부인 소담댁이 자는 황 의원을 깨워 왕진해달라고 애원했다. 손 초시가 쓰러져 입이 돌아가고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황 의원이 속으로 씨익 웃었다. 약발이 이제야. 천하의 황 의원이 파락호 손 초시한테 당할 수야 없지!
손 초시라는 인간은 통시에 갔다가 오면 다른 말을 할 놈이라는 걸 진작 알아보고 처방을 해놓았다. 한달 전 손 초시에게 보약을 지어줄 때 독도 함께 넣었던 것이다. 아편에 숙지황·부자·생청에 황 의원의 비약을 달여 먹이면 단기적으로 양기를 북돋워주지만 한달쯤 지나면 와사증에 실어증·허혈증이 오도록 돼 있다.
황 의원은 소담댁을 따라 손 초시 사랑방으로 갔다. 축 늘어진 손 초시가 황 의원을 보더니 기겁을 해서 손사래를 쳤지만 말은 못했다. 황 의원이 진맥을 하자 손 초시 팔이 사시나무 떨듯이 와들와들 흔들렸다. 황 의원은 손 초시 손목을 잡은 채 지난번 초시 어른이 저희 의원 입원실에 있을 때 부인께서는 진짜로.바로 그때 손 초시가 꿱꿰~짐승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사랑방 밖에서 귀를 세워 엿듣던 달래는 삼십육계를 놓아 나루터로 달려가 배를 탔다.
부인, 더운 물 좀.황 의원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부인은 달래를 부르다가 손수 부엌으로 갔다. 황 의원은 결국 손 초시 허리춤에서 열쇠를 받아 다락으로 올라가 돈 궤짝을 열고 이천냥을 꺼내 챙겼다. 그리곤 품속에서 실어증·허혈증 해독제인 환약을 손 초시 머리맡에 두고 사랑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