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67)처사와 심마니

jahun 2021. 12. 12. 18:57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67)처사와 심마니

소백산 조그만 암자의 흑운처사어느 스산한 밤 돼지꿈을 꾸는데


 
소백산 심심산골 조그만 암자의 어긋난 지붕 기와 사이로 와송이 비집고 나와 있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진 것도 모자라 칡넝쿨이 기단까지 기어 올라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자 법당 마루에 뚝뚝 빗방울이 떨어졌다. 게으른 흑운처사가 옹기를 들고 와 빗물을 받았다. 흑운처사가 법당에 모시는 신()은 부처도 아니요, 옥황상제도 아니요, 관운장도 아닌 삼신할미다. 아기 못 낳는 여인네가 삼신당에서 기도하면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는다고 흑운처사가 이 동네 저 동네 탁발을 다니며 소문을 냈다.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가물에 콩 나듯 하는 데다 가끔 삼일기도, 십일기도 하고 간 사람들도 약발이 없어 삼신당에는 바람소리, 새소리, 흑운처사의 코 고는 소리뿐이다.
어느 스산한 밤 꿈속에 산돼지 한마리가 내려와 흑운처사가 방금 누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을 맛있게 먹고 갔다. 흑운처사는 무릎을 쳤다. 돼지꿈만 꿔도 대박인데 똥꿈까지!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점심나절이 지나자 말 탄 대인 뒤로 고리짝을 진 하인들이 따르고 사인교 가마가 까닥까닥 올라와 삼신당 마당에 앉았다.
말 고삐를 잡았던 마부가 엎드리자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마부 등을 밟고 말에서 내린 나이 지긋한 대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흑운처사에게 합장을 했다. 풍기 최고 부자 권 대인이 딸을 가마에 태워왔다. 하회 류씨 집안으로 시집간 무남독녀가 삼년이 지나도 태기가 없자 친정아버지가 손수 딸을 데리고 삼신당을 찾은 것이다. 요사채에 손님들을 모셔놓고 흑운처사는 축지법을 쓰듯 번개처럼 산허리를 돌아 심마니 총각이 홀로 사는 너와집으로 달려가 하수오와 산양산삼을 외상으로 가져와 권 대인에게 대접했다.
이튿날 권 대인과 하인들은 하산하고 딸과 몸종만이 남았다. 백일기도에 들어간 것이다. 몸종이 잠에 곯아떨어진 사경~오경까지 흑운처사와 권 대인의 딸은 삼신당에서 기도를 드렸다. 요사채 부엌은 몸종 차지가 됐다. 봄나물을 뜯으러 산속을 헤맨 몸종이 초저녁부터 깊은 잠에 빠진 날 밤, 삼신당에서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던 권 대인의 딸이 한숨만 쉬더니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면서 말했다.
처사님, 밭만 일구면 뭣합니까. 씨를 뿌리지 않는데!
그날 밤, 삼신당이 지진이 난 듯 요동을 쳤다. 백일기도를 마치고 내려간 권 대인의 딸은 시집으로 가 아홉달 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흑운처사는 권 대인이 보낸 거금으로 암자를 새로 지었다. 불임 여인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삼신당에 모여들었다. 총각 심마니는 일년 전 흑운처사에게 외상으로 준 산양산삼과 하수오값을 받으러 산허리를 돌아 삼신당으로 갔다가 깜짝 놀랐다. 시세의 열배쯤 받았지만 너와집으로 돌아가는 심마니 총각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는 허구한 날 진짜 산삼은 못 캐고 산삼씨를 뿌려 기른 산양산삼을 풍기장터와 단양장터에 가서 진짜 산삼이라고 속여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술 퍼마시고 움막에서 들병이 고쟁이나 벗기느라 아직 장가도 못 간 스물일곱 노총각 심마니는 자기는 왜 돼지꿈·똥꿈을 못 꾸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올무를 놓아 산돼지 한마리를 잡아 부엌에 걸어놓고 매일 산돼지고기를 먹으며 길가의 똥이란 똥은 일부러 밟고 다니자 어느 날 밤 산돼지 대신 산신령이 나타났다. 이튿날 아침, 총각 심마니는 아침도 먹지 않고 망태를 메고 산속으로 달려갔다. 지난밤 꿈속에서 산신령이 가르쳐준 불암바위 아래로 숲을 헤치며 가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산삼밭이 펼쳐진 것이다. 백년근 산삼 서른여섯뿌리를 캐 안동으로 달려가 한약방에 팔아넘겨 거금을 손에 쥐었다. 그는 두번 다시 소백산 너와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풍산들에 논 120마지기를 사고 그림 같은 기와집을 짓고 선녀 같은 장 진사의 딸을 새 신부로 맞아들이고 집안에 하인들을 부렸다.
여봐라~
고함소리에 놀라 먼저 잠을 깬 사람은 흑운처사였다. 이 사람아, 꿈속에서 사또라도 된 게야?눈을 부스스 뜬 심마니 총각은 아직도 비몽사몽이다. 흑운처사와 심마니 총각은 풍기장터에서 만나 대낮부터 주막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낮술을 마시고 소백산으로 돌아가다가 잔디가 곱게 덮인 이름 모를 묘지에 누워 잠이 들었다가 그렇게 꿈속을 헤맸다.
두 사람은 잠에서 깨어나 제정신이 들자 속은 미식거리고 현실은 답답하고 갈 길은 먼데 다리는 후들거린다. 먼 산은 아지랑이로 하늘거리고, 만산은 진달래로 불타고, 온갖 잡새는 목청 높여 울어대고, 봄바람은 목덜미를 간질인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