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65)그믐달<하>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65)그믐달<하>
당산골 서당 말썽꾸러기 삼인방,
어릴적 버릇 그대로 어른이 돼 밤마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당산골 서당에 훈장님이 잠시라도 출타했다 하면 노동천이 책 보따리에서 골패를 꺼내 노름판을 벌였다. 큰돈은 아니지만, 엽전이 오갔다. 학동들이 한눈판 그사이에 도영복은 그 잽싼 손놀림으로 남의 조끼 주머니를 뒤지고 훈장님이 잠가놓은 안방 자물쇠도 철사 꼬챙이 하나로 따고 장롱을 뒤졌다. 오대근은 골패 놀음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훈장님 딸에게 수작을 걸었다.
춘하추동이 수없이 오가며 세월이 흘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가. 당산골 서당 말썽꾸러기 삼인방은 결국 어릴 때 버릇대로 어른이 됐다. 친구들 조끼 주머니에서 엽전을 훔치고 훈장님 안방 장롱을 뒤지던 도영복은 어른이 돼서는 대도(大盜)가 됐다. 장날이면 장꾼들 틈새로 비비고 다니며 전대를 털던 도영복은 쪼잔한 소매치기를 걷어치우고 부잣집 안방을 털기 시작했다. 특히 혼례식을 앞둔 신붓집 혼수는 도영복의 곳간에 쌓아놓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서당 시절, 윷놀이서부터 골패까지 틈만 나면 내기판을 벌이던 노동천은 이제 열두고을 노름판에 이름을 떨치는 노름꾼이 됐다. 골패·투전·쌍륙 할 것 없이 노름이라면 전천후였다. 속임수에도 도가 터 마술사처럼 골패가 소매 속을 들락날락하고 투전패가 손등에도 붙었다가 손바닥에도 붙었다. 서당 시절, 여름밤이면 밤마다 동네 처녀들 멱 감는 거 훔쳐보고 훈장님 딸에게도 수작을 걸던 오대근은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허우대를 바탕으로 동지섣달 긴긴밤도 밤이 짧다고 이 여자 저 여자 품속을 전전하는 희대의 오입쟁이가 됐다.
도둑 도영복, 노름꾼 노동천, 오입쟁이 오대근은 서당 시절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전공분야가 달라서일까. 서로 상대방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을 뿐인데 어른이 돼 이 세사람을 동병상련으로 엮어준 것은 당산목인 회나무와 그믐달이었다. 당산골 회나무에는 정초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동제(洞祭)를 올리고 무당·점쟁이·지관들도 이 신목(神木)에게 영험함을 달라고 빌고,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빌고, 병 낫게 해달라고 비는데 도둑·노름꾼·오입쟁이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이 세사람의 활동시기는 밤이다. 분야는 달라도 공통점이 많다. 아무리 재주가 좋다 해도 화가 따를 수 있다. 어둠이 내려 당산골을 빠져나와 개천 건너 읍내로 나가기 전 회나무 아래서 비는 걸 잊지 않는다.
“신목님, 오늘 밤은 허 진사네 집 혼수를 쬐끔 손보려고 합니다. 부디 무사히 일을 치르도록 보살펴주시옵소서.”
회나무에 절을 올리고 두 손 모아 비는 것은 도영복이다. 노동천은 “신목님, 오늘 밤은 큰 판입니다. 제발 제게 끗발 좀 올려주십시오”라고 빌었다.
바위 뒤에서 도영복에 이어 노동천이 빌고 가는 걸 보고 오대근이 나왔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오늘 밤은 외장꾼 박 서방 마누라를 위로해주려 하니….”
그들의 야간활동 무대는 개울 건너 읍내다. 회나무는 그들의 활약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우람한 덩치를 땅에 박고 수문장처럼 당산골을 지키며 이슬을 맞고 있었다. 성질 급한 수탉들은 동녘이 트지도 않았는데 “꼬끼오~” 하고 길게 목청을 뽑는다. 새벽이 다가오자 하나둘 야행성 인간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밤새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개울 건너 당산골에 발을 들여놓으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회나무에 절을 올리며 감사기도를 했다. 세사람은 회나무 아래서 가끔씩 마주쳤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이제는 서로 피하지도 않게 됐다.
어느 날 새벽, 세사람이 거의 동시에 회나무 아래서 마주쳤을 때 가지 끝에 차갑고 요염한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그믐달은 매달 스무이레, 스무여드레 단 이틀, 그것도 구름 없는 맑은 날 새벽, 먼동이 트기 직전 살짝 그 모습이 드러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한 많은 청상과부 같은 달이다.
“보기 힘든 저 달을 볼 수 있는 우리는 복 터졌네.”
오대근이 말하자 노동천과 도영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들은 회나무에 그들의 운을 맡겼지만 평생은 가지 못했다.
도둑 도영복은 혼수를 털려고 들어갔다가 삽살개에게 물리고 하인들의 몽둥이찜질에 뻗정다리가 됐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도 노름판에 잡히고 마누라 머리도 잘라 잡히며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잘라낸 손가락이 일곱개, 남은 손가락이 세개뿐인 노동천. 류 진사의 애첩과 통정을 하다가 잡혀 작두로 양물이 잘려나간 오대근. 세 친구는 노인이 돼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며 가끔 새벽이슬을 맞는다. 그믐달을 쳐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