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57)팔자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천석꾼 하진사의 고명딸 ‘미향’
아비가 누군지 물었다가 얻어맞은 하진사네 찬모 하곡댁의 외딸 ‘점순’
타고난 팔자가 하늘과 땅 차이인데…
점순이는 자신과 소꿉동무 미향이는 뭔가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예닐곱이 되자 점순이는 미향이를 미향이라 부를 수 없었다. ‘아씨’라 불렀다. 미향이는 천석꾼 부자 하 진사의 고명딸로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점순이는 하 진사네 찬모 하곡댁의 천덕꾸러기 외딸로 아비 얼굴도 몰랐다. 점순이는 어머니 하곡댁과 부엌에 딸린 뒷방에서 잤고 어른들이 먹고 남은 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점순이는 공기놀이나 소꿉장난을 하며 놀 때도 미향이를 아씨라 불렀다. 타고난 팔자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열살쯤 됐을까. 점순이가 제 어미 하곡댁에게 아버지는 어디서 뭘 하느냐고 물었다가 귀싸대기를 얻어맞고는 두번 다시 묻지 않았다.
한살 한살 나이가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점순이는 동갑내기 미향의 몸종이 됐다. 미향이는 성품이 착해서 점순이에게 모진 갑질을 하지 않았다. 동백기름에 박가분으로 단장을 하고 비단치마와 저고리로 몸을 감싼 미향이는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선녀 같았다. 하지만 검은 몽당치마 아래로 고쟁이가 나오는 점순이는 영락없는 몸종이었다.
하 진사 고명딸 미향을 두고 매파들이 들락날락하더니 강 건너 이 초시네 맏아들과 혼약이 이뤄졌다. 미향이는 별당에서 사군자를 치고 자수를 놓으며 조신한 신부수업에 들어갔다. 어느 날 밤 하곡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도 시집을 가야 할 건데….” 점순이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며칠 후 하곡댁이 점순에게 치마저고리를 입히더니 장터로 데리고 가서 조그만 새우젓가게에 딸린 살림집으로 들어갔다. 새우젓가게 주인 영감님이 들어왔다. “인사 올려라. 우 생원이시다.”
하곡댁은 제 딸을 새우젓 영감님에게 팔아넘기고 수월찮은 돈을 챙겨 뒷집 머슴과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점순이는 어미를 만나면 머리끄덩이를 낚아채겠다고 다짐을 하다가도 이제 서른넷인 어머니가 부디 잘 살라고 빌며 자신의 불운을 팔자소관으로 돌렸다.
새우젓 영감님은 착했다. 한평생 새우젓통을 지고 이 골짝 저 골짝 다녔다. 혼례도 올렸건만 마누라는 도망가버렸다. 이제는 무릎이 아파 산길을 걸을 수도 없어 저잣거리 끝에 조그만 새우젓가게를 내고 마누라로 맞은 점순이를 딸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고을이 떠들썩하게 강 건너 이 초시댁으로 시집간 미향이는 가을무 뽑듯이 아들 셋을 낳았다.
춘하추동 세월이 흘렀다. 새우젓 영감 우 생원이 죽었다. 십여년 부녀처럼 함께 살아 정이 들었다.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인 봄날, 점순이는 탈상을 하고 청주 한 호리병과 안주를 싸서 우 생원 묘소에 갔다. 술 한잔 따라놓고 절을 한 후 잔디밭에 앉아 청주 한잔을 마시는데 지나가던 노스님이 말을 걸었다. “나도 곡차 한잔 주게.” 점순이가 어릴 때부터 탁발을 다니던 노스님이라 낯이 익어 그만 대작을 하게 됐다.
술잔이 몇순배 돌 무렵 점순이가 팔자타령을 늘어놓다가 깜짝 놀랄 소리를 들었다. 갑자을축을 짚어보던 노스님이 말했다. “자네가 올해 스물아홉이지. 서른둘이 되면 자네와 하 진사의 딸 미향이 팔자가 서로 바뀔 걸세.” 노승은 술에 취했는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뱉고 산속으로 가버렸다. “청주 몇잔 얻어 마셨다고 저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니 땡추중이지.”
점순이는 새우젓가게를 팔아치우고 살림을 정리하다가 안방 다락 깊숙한 곳에서 돈통을 발견했다. 깜짝 놀랐다. 삼천육백냥이 들어 있었다. 점순이는 나루터 옆에 집을 짓고 주막을 열었다. 돈벌이도 짭짤했지만 점잖은 선비나 거상을 안방에 불러들여 대작을 하고 촛불을 꺼 받은 해웃값이 알돈이 됐다. 부엌데기 하나 데리고 사니 혼자여도 밤이 외롭지 않았다.
어느 날 미향이가 찾아왔다. 이게 몇년 만인가. 얼굴이 수척하다 했더니 고생길을 들려줬다. 신랑은 과거 보러 한양에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더니 요 삼년 드러누웠고 막내아들은 세살이 됐는데 아직 걷지도 못하고…. 눈물을 훔치던 미향이가 모깃소리만 하게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빌려달라 했다. 돈을 듬뿍 쥐여줘서 돌려보내고 만감이 교차해 나루터에 앉아 있는데 나룻배에서 땡추가 내렸다. 점순이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스님!” 제 나이를 가늠하니 서른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