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27)물방개

jahun 2021. 11. 4. 22:37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27)물방개

 

갓난아이 안고 사또 찾아온 다래댁 아이의 아비를 찾아달라는 요청에

사또는 기막힌 묘수를 내놓는데…

 

우아한 여인이 천박한 송사를 제기했다. 낳은 지 한달도 안된 아이를 안고 와 아이 아비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목하는 아비는 무려 다섯이니, 다섯 남정네와 살을 섞었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사건이라 사또가 그 여인을 직접 만나봤다. 여인이 자필로 쓴 소장을 받아든 사또는 더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필력이 상당할 뿐 아니라 그녀의 행동거지도 막돼먹지 않았다. 사또는 서른두살 다래댁의 내력부터 듣기로 했다.
다래댁은 부자는 아니었어도 뼈대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조부로부터 <사자소학>까지 배우고 엄한 부모 밑에서 조신하게 신부수업을 받아 양반집에 시집을 갔다.
그런데 신랑이란 사람이 키만 컸지 피골이 상접한 데다, 좁은 어깨는 올라가고, 손가락은 길었으며, 핏기라고는 없는 백면서생이었다.
첫날밤에 신부 옷고름도 풀 줄 몰랐다. 신랑은 며칠 후 술 냄새를 풍기며 신부 옷을 벗기고 기어오르더니 껍적거리다가 픽 쓰러졌다. 다래댁 다리 사이가 미끄덩거리고 밤꽃 냄새만 지독하게 온 방을 채웠다.
새신부 다래댁이 무얼 알았겠는가. 이것이 신랑 신부의 합방인가보다 추측만 했다. 신랑이란 게 책만 읽고 이렇게 신부 곁에 오기는 가뭄에 콩 나듯이 뜸했다.
결국 5년 만에 다래댁은 아이를 못 낳는 석녀로 낙인찍혀 시집에서 쫓겨났다.
다래댁은 바느질 솜씨 하나로 이집 저집 다니며 대갓집 침모 생활을 했다. 그러다 삼년 전에 천석꾼 부자 최 참봉 댁의 침모로 들어가 이때껏 지내오고 있었다. 몇년 전부터 다래댁 속옷 속에 벌레가 기어다니는지 온몸이 근지럽고 열이 올랐다. 방물장수 아줌마에게서 목신 하나를 사고부터는 밤마다 그냥 자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허전했다.
어느 여름날 밤, 다래댁은 뒤뜰 우물가에서 멱을 감는 총각 머슴인 마당쇠의 양물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목신을 찾았다. 최 참봉의 막내 삼촌이 상을 당해 온 식구들과 하인이 고개 너머 상가에서 밤을 새운 날, 침모 다래댁은 술상을 차려 마당쇠 방을 찾았다. 요란한 밤을 지새우고 동창이 희끄무레 밝아 올 때 제 방으로 기어들어온 다래댁은 기분 좋은 녹초가 됐다. 안방마님이 친정엄마 문병을 간 날 밤에는 최 참봉이 침모 방으로 들어왔다. 다래댁은 저항하는 시늉만 하고 몸을 허락했다. 그녀는 마침내 남자를 알았고 잃어버린 세월이 억울했다. 다래댁은 자신이 석녀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남자를 거리낌 없이 섭렵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래댁이 석녀가 아니라 전 신랑이 씨 없는 수박이었다.
다래댁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비를 꼭 집어 가려낼 수 없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으로 일기를 꼬박꼬박 썼으나 일기를 봐도 아비를 알 길이 없었다.
몸을 섞은 다섯 남자가 모두 자기는 아비가 아니라고 발뺌하니 사또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다섯 남정네가 누구누군가?” 사또가 묻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래댁이 한참 뜸을 들이다 실토했다.
최 참봉과 마당쇠를 제외한 나머지 세사람은 감나무를 타고 담을 넘어온 뒷집 박 서방, 행랑아범, 그리고 최 참봉의 열일곱살 아들이었다.
사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래댁, 그 아이 아비가 최 참봉이라면 최 참봉 아들은 제 어미를 범한 것이야.”
다래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쇤네가 석녀가 아니라는 걸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요.”
“아무리 뜯어봐도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지?” “네.” 사또가 다래댁 일기를 토대로 다섯 남정네의 합방 횟수를 꼽았다. 최 참봉이 22번, 마당쇠가 16번, 박 서방이 5번, 행랑아범이 4번, 최 참봉 아들이 2번이었다.
다음날이 고을 장날이었다. 이방이 물방개 야바위꾼을 데려왔다. 그리고 합방 횟수를 반으로 나눠 칸을 만들고 물방개를 가운데 떨어뜨렸다. 그런데 물방개가 뱅글뱅글 돌다가 쏙 들어간 곳이 하필이면 두칸밖에 안되는 행랑아범이었다.
합방 횟수에 오십냥씩 곱해 최 참봉은 천백냥, 마당쇠는 새경을 미리 당겨 팔백냥, 뒷집 박 서방은 이백오십냥, 최 참봉 아들은 백냥, 합쳐서 이천이백오십냥을 거둬 홀아비 행랑아범 단봇짐에 넣어줬다.
행랑아범이 앞서고 아이를 업은 다래댁이 뒤따라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세식구는 멀리멀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