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으로, 처세와 계책의 달인 진평(陳平)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으로, 처세와 계책의 달인 진평(陳平)
중국의 두 번째 통일 왕조
한(漢)나라의 건국 황제가 된 유방(劉邦)은,
농민 출신의 자신이 명문가 출신의 항우(項羽)를 이기고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장량(張良)처럼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蕭何)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전쟁에 나서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일은 한신(韓信)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안다. 반면 항우는
범증(范增: 항우의 책사)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고, 항우는 얻지 못한 이유이다".
사람들이 흔히 유능한 참모를 칭할 때,
장량의 자(字)인 자방(子房)을 따서 "장자방"이라 부를 정도로,
장량은 중국사를 대표하는 책략가(策略家)입니다.
또 유방이 발표한 건국 공신 137명 중 서열 1위에 오른 소하는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재상(名宰相)이며,
한신은 중국사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명장(名將)입니다.
그리고 유방은 이들의 조화로운 보좌를 통해
천하통일을 이룬 것인데, 역사에서는 이들을
한삼걸(漢三杰) 또는 건한삼걸(建漢三傑)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한삼걸이 건국 이후 특별한 활약을 보이지 못한 것에
비하여, 건국 이후 나라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한 개국공신이 또 한 사람 있는데,
그가 바로 처세와 계책의 달인 "진평(陳平)"입니다.
진평은 전국시대 말기
위(魏)나라 호유향(戶牖鄕: 오늘날 허난성 란카오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농사를 짓는 형 진백(陳伯)의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진평에게는
학문에만 열중하라고 밀어주는 형의 배려와 도움으로,
학문을 쌓고 사람을 만나 견식을 넓힙니다.
그러나 자신과 남편은 온갖 고생을 다하며 살아가는데,
집안일에는 손도 까딱 않는 진평을
형수는 당연히 미워하고 구박했는데, 어느 날 형수가
진평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쌀겨와 같다고 욕을 하자,
그 말을 들은 진백이 자신의 아내를 내쫓아 버립니다.
진백이 동생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동생의 자질을 알아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진백은 자신의 아내를 버리면서까지 동생을 밀어준 것입니다.
이윽고 진평이 나이가 들어 장가 갈 때가 되자,
진평은 자신의 신세를 바꿔줄 부잣집에 장가를 가고자 했는데,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진평에게 딸을 내줄 부잣집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평은
마을에 상가(喪家)가 생긴 것을 기회로 삼아
장부(張負)라는 부자의 눈에 들게 됩니다. 진평은
상갓집에 누구보다 일찍 가서 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도왔는데, 이를 지켜본 장부가 그의 근면함에 눈길을 주게 되고,
뒷조사를 통하여 진평이 학문도 높으며
여러 사람들과 교분을 쌓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진평의 자질을 알아본 장부는
자신의 손녀딸을 진평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사실 그녀는 다섯 번 시집가서 다섯 번 과부가 된 여자로,
아무도 그녀와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도 그녀의 부친인 장중(張仲)은, 마을 사람 모두가
우습게 보는 진평에게 어떻게 딸을 주느냐고 반대합니다.
결국 장부의 뜻에 따라 두 사람은 결혼을 하는데,
부잣집 사위가 된 진평은 마음껏 돈을 쓰면서,
교류의 폭을 넓히고 자신을 더욱 연마합니다.
한 번은 진평이 마을에서 사제(社祭: 토지신에 올리는 제사)를
지내고, 고기를 나누어주는 사재(社宰) 역할을 하게 되는데,
모두에게 공평하게 고기가 나누어지면서
마을 사람들은 탄복을 합니다.
제를 지낸 후 함부로 고기를 집어먹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사재(社宰)에 의한 분배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식탐을 부리지 않고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진평은
"나에게 천하를 나누는 재상 일을 맡겨도
공평하게 잘 할 것인데..."라며 탄식을 합니다.
BC 209년 진(秦)나라 멸망의 계기가 되는
진승·오광의 난(陳勝吳廣起義)이 일어나자,
전국의 군웅(群雄)들도 군사를 일으키는데,
이때 진평은 위왕(魏王) 위구(魏咎)의 휘하로 들어가,
책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나라와 전쟁을 치르던 중,
BC 208년에는 진나라 장한(章邯) 장군의 공격으로
위군(魏軍)이 임제성(林濟城)에서 포위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진평이 계책을 내는데,
백성들을 미끼로 내세워 거짓 항복을 하고,
그 틈을 타서 위구(魏咎)는 반대쪽 문으로 도망을 하라는 것으로, 백성을 죽이더라도 왕을 살리겠다는
진평의 처세를 엿볼 수 있는 계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위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항복을 하고
자신은 분신자살을 합니다.
이렇게 되자 자신이 몸담을 곳이 없어진 진평은,
위나라를 떠나 초(楚)나라 항우의 수하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초나라가 진나라를 쳐부수고 항우가 패권을 잡는데
여러 차례 공을 세우면서 높은 관직도 받게 됩니다.
BC 206년에는 중원의 주인 자리를 놓고
항우와 유방 사이의 전쟁인 초한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BC 205년에는 항우에 의하여 제후왕에 봉해진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이,
항우를 배신하고 유방 편에 서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항우는 진평과 장수들을 보내 은왕(殷王)을 치도록
했으며, 진평은 은왕을 평정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유방이 다시 공격을 하자,
은왕은 제대로 대항도 하지 않고 유방에게 항복을 합니다.
대노한 항우는 지난번 은왕 정벌에서 은왕을 바로잡지 못한
지휘관들의 책임을 물어 모두 죽이겠다고 난리가 났고,
자신도 죽을 수가 있었던 진평은 잽싸게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진평은 그동안 항우에게 상으로 받았던 재화를
모두 챙겨 항우에게 돌려보내고 맨몸으로 도망을 치는데,
이는 그의 목숨을 구하는 절묘한 한 수가 됩니다.
진평이 황하(黃河)를 건너기 위해 배를 타자,
훤칠한 외모에 좋은 옷을 입은 진평을 본 뱃사공들은,
금품을 챙겨서 도망치는 사람이라 생각하여
진평을 죽이고 금품을 갈취하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진평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노 젓는 것을 돕습니다.
그리고 옷에도 몸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본 뱃사공들은
진평을 죽이려던 생각을 접게 됩니다.
이렇게 항우를 떠난 진평은, 자신의 오랜 친구로
유방의 참모인 위무지(魏無知)의 천거로 유방을 만나게 됩니다. 진평과 유방이 단독으로 만난 자리는 아니었고,
추천된 여러 인재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로, 유방의 입장에서는
같이 밥이나 한 끼 한다는 수준의 만남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방은 대충 식사를 하고 돌려보내려 하는데,
진평이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단독 면담을 청합니다.
그리고 단독 면담을 통하여
진평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본 유방은 크게 기뻐하며,
진평을 도위(都尉: 군내의 치안 담당 고위직)에 임명하고
참승(参乘: 수레에 함께 탐)을 하도록 했으며,
장수들을 감독하는 호군(護軍)의 임무를 맡깁니다.
그러자 한나라 장수들은
처음 만난 초나라 도망병과 수레를 함께 타고,
그에게 역전의 용사인 자신들을 감독하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반대하는데, 유방은 자신의 뜻을 밀어붙입니다. 그러자 얼마 후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 장군들이
본격적으로 진평 탄핵에 나섭니다.
진평은 두 번이나 모시던 사람을 바꿀 정도로 신의가 없으며,
품행이 불량하고, 뇌물을 밝히는 자이니
중용(重用)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신하들이 이러니, 자신도 마음이 흔들린 유방이
진평을 불러 묻는데, 진평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위왕(魏王)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아 떠났고,
초왕(楚王)은 사람을 믿지 못해 떠났으며,
한왕(漢王)은 사람을 잘 쓰신다고 하기에 온 것입니다.
신은 맨몸으로 왔기에 장군들이 주는 뇌물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신이 쓸모가 없다면
받은 뇌물은 모두 관(官)으로 보내고 물러 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더욱더 진평을 믿고 중용하였으며,
장수들도 더 이상 딴 소리를 하지 않게 됩니다.
BC 205년 4월에는
유방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 팽성(彭城)을 공격하는
팽성전투(彭城之戰)가 벌어집니다.
초반에는 유방이 항우가 없는 팽성을 손쉽게 함락시켰으나,
뒤늦게 달려온 항우와 3만 군사에
유방의 60만 대군이 거의 전멸을 당하면서,
유방은 형양성(滎陽城)으로 쫓겨가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유방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인데,
이때 진평이 나서서 자신에게 수만 금(金)을 내려주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다급했던 유방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4만 금을 내려주는데,
진평은 이 자금을 이용하여
항우와 신하들을 갈라놓는 반간계(反間計)를 펼칩니다.
"책사 범증(范增), 대장군 종리매(鐘離昧) 등이
공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유방과 내통을 한다"는 소문을 민간에 퍼트린 것입니다.
이 소문은 항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잘 믿지 않는 데다가,
스스로 찔리는 것이 있었던 항우는 크게 의심을 품게 되고,
범증과 종리매 등 신하들을 멀리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유방이 시간을 벌기 위해 강화(講和)를 제의하자,
항우는 사신을 보냅니다. 사신이 오자,
진평은 사신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도록 하는데,
잠시 후 나타나서는
"범증이 보낸 사신인 줄 알았더니, 항우의 사신이네"라며,
진수성찬을 치우고 평범한 밥상을 내주도록 합니다.
그리고 사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보고받은 항우는,
범증의 배신을 확신하게 되고,
하루빨리 형양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범증의 조언도 무시합니다. 그러자 항우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범증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울화병에 등창까지 악화되면서,
결국 고향으로 가는 길에 7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뒤늦게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 크게 노한 항우는
형양성을 향해 맹공을 퍼붓는데,
진평은 유방에게 내일 아침 동문(東門)으로 투항을 하겠다는
뜻을 항우에게 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동문으로 갑옷을 입은 부녀자 2천여 명과
가짜 유방을 내보내 초군(楚軍)의 시선을 끌도록 하고,
자신은 유방과 신하들을 챙겨서 서문(西門)을 통해 탈출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까지 구해준 진평에 대한 유방의 신임은
극에 달했으며, 진평은 상으로
엄청난 식읍(食邑: 공신에게 내린 영지)까지 받게 됩니다.
팽성전투는 항우가 승자가 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으나,
진평의 계책으로 항우는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으며,
유능한 책사인 범증까지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BC 202년 벌어진 마지막 결전 해하전투(垓下戰鬪)에서
유방이 최후의 승자가 되고 천하를 통일합니다.
황위에 오른 유방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공신들을 제거하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분위기로 보면,
개국 초기 왕권 강화를 위한 내부 숙청은
대부분 신생 국가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장량은
스스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건국 공신 서열 1위에 오른 소하는
자식들을 모두 유방 곁으로 보내 유방을 안심시키고
납작 엎드려 지내면서 칼날을 피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왕에 봉해줄 것을 유방에게 요구하여
초왕(楚王)이 된 한신은,
계속 유방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일삼았는데,
결국 BC 201년에는 모반을 도모한다는 보고까지 올라옵니다.
그러자 유방은 군사를 동원하여 한신을 치려고 하는데,
진평이 극구 만류합니다.
군사력이 강한 한신과의 정면 대결은 실패할 수도 있으며,
자칫하면 통일 제국이 다시 분열의 길로 들어서는
화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방이 한신의 영지(領地) 근처로 순행(巡行)을 나가면, 한신이 인사드리러 올 것이니, 이때 한신을 사로잡자고 합니다.
얼마 후 유방이 진주(陳州)로 순행을 나가는데,
진평의 예상대로 한신이 영접을 나왔고,
유방은 한신을 체포하여 장안(長安)으로 압송합니다.
그리고 초왕(楚王) 한신을 회음후(會陰后)로 관직을 낮추고,
장안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게 하여 한신을 구속합니다.
이후 유방은 진평의 책략에 따라 여러 공신들도 정리하여
황권을 강화하였으며, 새 출발한 나라의 정세도 안정이 됩니다.
이에 유방이 진평의 공을 치하하며 상을 내리자,
진평은 이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
자신을 유방에게 천거한 위무지(魏無知)의 공이라며
자신을 낮추는 처세술을 보여줍니다.
BC 200년 북방의 흉노(匈奴)가 침공하자,
유방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정합니다.
그러나 흉노의 계략에 말려, 유방과 군사들은
산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백등산(白登山)에 갇혀
포위되고 맙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 날씨에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을 버텼지만 출구는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진평이 계책을 냅니다. 그리고 전쟁터까지 함께 올 정도로
대단한 여인이었던 선우(單于: 흉노족 군주)의
알씨(閼氏: 정실부인)를 몰래 찾아갑니다.
알씨를 만난 진평은 알씨에게 금은보화를 바치며,
화의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줄 것을 청합니다.
그리고 별도로 미인이 그려진 초상화 한 장도 전합니다.
알씨가 뭐냐고 묻자, 금은보화는 알씨를 위한 선물인데,
그것만으로는 선우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니,
선우에게는 그림 속의 미인도 바치겠다는 뜻을
전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 구원병이 도착할 것이라는 말도 흘립니다.
그림 속의 미인은 알씨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미인이었는데,
이런 여인이 선우에게 바쳐지면,
자신은 찬밥 신세가 될 것으로 생각한 알씨는,
곧 지원군도 온다고 하니 이제 화의를 받아들이라고
밤을 새워가며 선우를 강압적으로 설득합니다.
다음날 아침 알씨의 설득에 넘어간 선우가 병력을 뒤로 물리자,
유방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포위망을 탈출하였으며,
이렇게 진평의 계략으로 유방은 또 한 번 목숨을 구합니다.
BC 195년에는
건국 공신 영포(英布)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갔던 유방이,
반란군이 쏜 화살에 부상을 입고 자리에 눕게 됩니다.
그러던 중 건국 공신인 대장군 번쾌(樊噲)가
여황후(呂皇后: 유방의 정실 부인)와 손을 잡고,
유방이 총애하는 후궁 척부인(戚夫人)과 그 아들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격노한 유방은
진평과 주발을 보내 즉시 번쾌를 참수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번쾌는 여황후의 동생인 여수(呂嬃)의 남편으로,
자칫 잘못했다가는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진평과 주발은 의논 끝에 번쾌를 죽이지 않고
일단 장안으로 압송해 옵니다.
그리고 돌아오던 중에 유방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부랴부랴 장안으로 돌아온 진평은
유방의 영전에 엎드려 통곡을 하면서,
"번쾌를 참수하라는 명을 감히 이행할 수 없어 압송해 왔다"고
고합니다. 사실은 옆에 있는 여황후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이 말을 듣고 여황후와 동생 여수는 크게 기뻐하였으며,
이런 처세를 통하여,
진평은 위기를 넘기고 여황후의 신임까지 얻게 됩니다.
이후 여태후(呂太后)의 친자 유영(劉盈)이
16살의 나이에 2대 황제 혜제(惠帝)가 되는데,
이때부터 섭정에 나선 여태후의 전횡이 시작됩니다.
먼저 자신의 세력이 없었던 여태후는
여씨(呂氏)들을 왕(王)에 봉하여 영지를 내려주고,
군직(軍職)과 요직(要職)에 임명하여 여씨 세력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여씨 세력을 기반으로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공신들을 제거하고
온갖 방법으로 부(富)를 축적하는 것은 물론,
황제도 마음대로 갈아 치웁니다.
그러자 강직한 재상 왕릉(王陵)은
잘못된 일에는 단호하게 "안됩니다"라며 바른 말을 하는데,
진평은 모든 일에 "괜찮습니다"라고 일관합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선제(先帝)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역시 위구와 항우를
배신한 것처럼 유씨(劉氏) 주인도 배반을 한다"라고
진평을 비난을 합니다. 그러자 진평은 "지금 내가 간언은
왕릉만큼 못하지만,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劉氏) 후손을
안정시키는 일은 내가 더 잘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진평은 정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매일 술을 마시고 술자리에서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이어갔는데, 오히려 이런 모습으로
여태후의 견제에서는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BC180년에는 궁 밖으로 나갔다가
개에게 겨드랑이를 물리면서 병을 앓게 된 여태후가,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모두가 눈치를 보며
갈팡질망하고 있을 때, 제일 먼저 진평이 움직입니다.
진평은 주발 등 건국 공신들을 모아 기습적으로 황궁을
점령하고, 여씨(呂氏)가 황제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던
여씨 일족들을 모두 제거하였으며,
유방의 넷째 아들 유항(劉恒)을 5대 황제 문제(文帝)로 올립니다.
이렇게 하여 여태후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던 진평이,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劉氏) 후손을 안정시키는 큰 일을 해냅니다.
황위에 오른 문제는 진평의 공을 치하하며,
진평을 우승상(右丞相)에 임명하려 하는데, 진평은
"저보다 주발이 더 공이 크고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양보하면서, 자신은 주발의 아래인 좌승상(左丞相)을 맡는
처세의 달인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후 주발이 자신의 능력 부족을 깨우치고 스스로 물러나면서, 결국 진평이 우승상에 오르는데,
문제(文帝)를 황위에 올린 지 2년 만인 BC 178년
진평은 세상을 떠납니다(출생연도 不明으로 나이 不明).
초한전쟁의 승자가 된 유방 자신도 이야기한 것처럼,
인재를 중용한 유방 밑에는 장량, 소하, 한신은 물론,
옥리(獄吏) 출신의 조참(曹參), 마부 출신의 하후영(夏侯嬰),
백정 일을 하던 번쾌(樊噲), 나팔수였던 주발(周勃),
도적떼를 이끌던 팽월(彭越) 등
다양한 출신의 개국 공신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뛰어난 전략가도, 용맹한 장군도 아니었던 진평은
유방이 발표한 개국 공신 137명 중 47위에 이름을 올립니다.
중도에 합류한 진평이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장의 수모를 참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처세와
남들과는 차별화되는 기이한 책략 덕분으로,
진평은 장량, 소하, 한신과 함께 한사걸(漢四杰)로 불러도
될 정도로, 한나라를 구한 처세와 계책의 달인이었습니다.